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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사 2년차 중반에 접어들던 지난 초여름, 처음으로 혼자 주택 설계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대상 부지를 답사를 시작으로 사례조사와 대지분석, 기본설계 제안까지의 초기 과정은 학교에서 하던 설계스튜디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계획안이 어느정도 잡히고 본격적으로 공사용 도면을 그리는 실시설계가 진행되면서 부터는 난생 처음해보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라 시간이 오래걸리는건 물론이고 마음고생도 심했다. 다행히도 이제는 설계가 거의 마무리되어 착공을 준비하는 중이다.


 건축에서 도면은 설계자의 생각을 시공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도구다.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는 물론이고 창호도, 내부전개도, 화장실상세도, 천장도, 우오수계통도 등 수 많은 종류의 도면들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구조, 설비, 전기, 조경 등 여러 외주업체에서 보내오는 각 계통의 전문적인 도면들까지 합치면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지어지지 않아도 되는 건물을 설계 했던 학창시절에는 경험해볼 수 없었던 일이기에 도면을 그리고, 검토하는 일들이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여러 도면들 중에서도 최근들어 내 마음을 사로잡은건 다름아닌 '구조도'다. 물론 모든 도면이 다 중요하고 의미있지만 내가 그린 형태가 구체적인 숫자와 계산들을 통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흥분되는 그런 것이다. 구조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학창시절의 그림이 아닌 진짜 건축 도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요즘이다.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발렌시아의 명소, 예술과 과학의 도시


 발렌시아를 여행하던 3년전, 난 겨우 4학년 어린 학생이었다. 지금이야 매일같이 하는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건물이 실제로 지어지기 위해서 어떤 과정들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넌 어떤 건축가를 제일 좋아하니'라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하는데 매번 똑 부러지게 대답을 못했던게 사실이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 여러 건축가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을 고른다는 것도 좀 그렇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의 건축철학이나 취향을 벌써부터 기성 건축가에 빗대어 정해버린 다는 것도 마음내키지 않아서였다. 물론 지금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분명 그날 발렌시아를 두 발로 걸었던 이후 칼라트라바는 건축가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발렌시아 지도, 북쪽 초록색 띠가 과거 뚜리아 강의 흔적이다. 남쪽으로는 잘 정리된 운하가 보인다.


 우리는 구시가에서 부터 옛 뚜리아(Turia) 강을 따라 해변쪽에 위치한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까지 걷기로 했다. 이 곳은 로마인들이 발렌시아에 처음 도시를 세웠을때 부터 흐르던 유서깊은 강이지만 지금은 완전히 매립하여 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왜 오래된 강이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교환학생에서 돌아와 '도시계획' 수업에서 발표 준비를 하며 우연히 뚜리아 강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찾게 되었다.


 발렌시아 구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던 뚜리아 강은 자주 범람하여 피해를 입히곤 했는데 1957년 대홍수로 도시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 당국은 도시 반대편으로 거대한 운하를 새롭게 만들었고, 이후 유량이 분산된 뚜리아 강은 물이 모두 말라 지금과 같은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뚜리아 강을 따라 잘 조성된 공원의 모습


 강을 따라 걸으며 만나는 풍경들이 상당히 이국적이다. 지중해 연안의 해양도시라 그런지 마드리드와는 기후도 좀 다르고 식생 또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공원을 찾아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구도시 한가운데를 지나는 강이라 접근성이 좋은것도 큰 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가 전형적인 미국식 도시계획에 의한 장방형 도심공원이라면, 발렌시아에서 엿본 뚜리아 강은 오랜 역사와 유럽인의 정서가 묻어나는 자유롭고 편안한 형태의 공원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사람들의 정서에는 후자가 조금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발렌시아의 오렌지는 어떤 맛일까...?


 발렌시아는 빠에야(la paella)나 오르차타(orchata)의 원산지로도 알려져있지만 오렌지가 많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공원에도 군데군데 오렌지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마침 땅에 떨어져있는 과실들이 여럿 보여서 두어개 주워서 맛을 좀 봤다. 아직 덜익었는지 아니면 관상용 품종이라 그런건지 그냥 시고 떫었다. 괜히 입을 댓다가 실망만 더했다. 발렌시아에서 오렌지를 맛보고 싶다면 길가에 떨어진것 말고 꼭 구시가 오렌지 마켓에 들러서 맛보시길...




딱정벌레? 투구? 아니면 불시착한 우주선?


 마침내 눈앞에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dad de las Artes y las Ciencias)의 초입을 알리는 첫번째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불시착한 우주선 같기도 한 이 건물의 이름은 레이나 소피아 예술관(El Palau de les Arts Reina Sofia)으로 4,400석 규모의 오페라 극장이다. 인터넷의 설명을 찾아보면 보는 각도에 따라 딱정벌레, 투구와 같은 모습으로 달리 보인다고 한다.






거대한 구조물임에도 유려한 곡선이 돋보인다


 자연물에서 모티브를 얻고 건축물의 구조 그 자체를 미적 요소로 해석해내는 것이야말로 건축가 칼라트라바의 특징. 이 건물 역시 철근콘크리트라는 육중한 재료를 사용했음에도 마치 얇은 종이를 접고 구부려 살포시 올려놓은듯 한 착각을 들게 만드는 점이 재미있다. 물론 구조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첫인상이 만만찮은 건물임에는 분명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스팬(span)의 켄틸레버


 이 건물의 백미는 바로 저 얇고 날카롭게 끝나는 지붕 슬래브다. 수십미터에 이르는 길이의 콘크리트 슬라브를 단 하나의 수직부재 없이 켄틸레버(cantilever, 외팔보, 한쪽 끝은 고정되고 다른쪽 끝은 자유로운 들보)로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꼭 바람만 살짝 불어도 무너질것 처럼 아슬아슬해 보여 보는 사람마저 긴장하게 만들 정도다. 학창시절 사진으로만 봐오던 구조의 결정체를 눈앞에서 보니 그야말로 감개무량.



잔잔한 수면에 비친 모습이 사람의 '눈'을 닮았다


 두 번째 건물은 마치 콩벌레를 닮은 듯한 외관을 한 레미스페릭(L'Hemisfèric)으로 용도는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아이맥스 영화관, 천체관, 레이저 상영관이 있다고 한다. '지혜의 눈 이라는 애칭이 있다고 했는데 과연 반구형의 건물이 넓은 수면이 반사되어 커다란 눈과 비슷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광고에도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 건물이다


 오페라 극장을 지나 계속해서 수반을 따라 걸으면 세번째 건물, 프린씨뻬 펠리페 박물관(El Museo de les Ciències Príncipe Felipe)이 보인다. 마치 고슴도치나 갑각류를 떠올리게 만드는 뾰족한 비늘 형태의 입면이 인상적인 건물로, 3층으로 구성된 거대한 과학 박물관이라고 한다. 다른 건물은 몰라도 꼭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저녁 느즈막히 도착한 터라 입장시간이 이미 끝나고 말았다. 아침에 프리투어를 마치고 걸어서 이곳까지 오느라 시간을 끌었던게 화근이었다. 언젠가 다시 올 일이 있길 바라며... 아쉽지만 계속 앞으로 전진.





이곳이 정녕 인간세상이란 말이오...?


 잠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그야말로 별세계가 따로 없다. 전체적으로 흰색 곡선의 건물들이 옅은 에메랄드빛 물 위에 떠있으니 저 멀리 다른 행성에 와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보면 동물의 뼈처럼 보여 조금은 오싹하기도 하고...


곡선형의 주탑이 인상적이었던 사장교


 단지내에 있는 건물들은 물론이고 크고작은 교량 역시 모두 칼라트라바의 작품이다. 구조미를 강조하는 칼라트라바 작품의 특성상 건물 보다는 교량과 같은 토목구조물 쪽에서 더 강한 인상을 주는 면모가 있다. 다만 사진 속 교량은 내 취향과 살짝 거리가 있어서 패스. 그 뒤로 보이는 짙은 파란빛의 아고라(L'Àgora)를 향해 계속 걸었다.


말 그대로 아고라, 발렌시아의 각종 향사를 개최하는 곳이다


 2009년에 완공된 건물로 이 곳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다. 각종 운동경기, 회의 등을 개최할 수 있는 다목적 홀로 실제 발렌시에서 열리는 중요한 행사들을 이 곳에서 진행한다고 한다. 계속해서 흰색 건물들만 봐 오다가 별안간 파란색 건물을 만나니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에 비하면 감동이 조금 덜한 편이다.



저 멀리 지는 태양을 보니 여기가 지구는 맞구나...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미 도착했을때 부터 입장 시간도 지나있었고 날씨도 추운탓에 에술과 과학의 도시를 돌아보는 내내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초현실적인 느낌이 강했던것 같기도 하다. 

 분명 발렌시아는 스페인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 까지는 관광객들에게 외면당하던 비운의 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범람하던 뚜리아 강이 새 운하로 인해 자연스레 말라버리고, 그 자리를 매립하여 1996년 부터 조성한 과학과 예술의 도시는 발렌시아를 스페인 여행 명소로 만드는데 한 몫 톡톡히 했다. 마치 스페인 북부의 빌바오라는 공업도시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통해 관광명소로 거듭난 것과 같은 이치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단순히 칼라트라바의 건축물을 보아 좋았다기 보다는 예술과 과학의 도시를 통해 발렌시아의 역사를 알게 되어 더욱 기억에 남는다.





결국 해변을 보지 못하고 지하철로 복귀했다


 본래 계획은 계속해서 해변가지 걸어 지중해를 보는 것이었지만 추위와 허기로 인한 급격한 체력강하로 포기하고 말았다. 돌아와서 들으니 발렌시아 해변이 그렇게 예쁘다고 하던데... 나중에 따듯한 계절에 꼭 한번 들르기로 하고 아쉬운 마음 훌훌 털어버렸다. 하루종일 열심히 걸었던 뚜리아 강을 거슬러 지하철을 타고 안전하게 시내로 돌아왔다.


자, 다시 우리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유레일 패스가 남아있는 현재는 마드리드행 AVE(스페인의 고속열차)를 탔고, 난 여행자가 아닌 탓에 혼자 버스 터미널로 가서 마드리드행 밤버스에 올랐다. 이것으로 짧은 스페인 동부여행을 마치고, 다시 마드리드의 베이스캠프로 복귀한다. 며칠간의 휴식을 가지고 다음 여행을 준비하기로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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