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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샘추위가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3월, 나는 소장님 앞에 당당히 휴가 신청서를 내밀었다.

 휴가일수 4일, 휴가사유는 무려 자전거 국토종주!

 

 지난 아라뱃길 테스트 라이딩 이후 본격적인 여행 준비에 착수했다. 직장에 발이 묶인 몸이다보니 무엇보다도 전체 일정을 정하고 휴가부터 확정 짓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종주 코스는 약 600km 정도. 하루에 100~120km씩 무난하게 탄다고 치면 4박 5일이 적절해 보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2박 3일, 심지어 1박 2일만에 완주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바퀴가 작은 미니벨로의 주행력을 고려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4박 5일 일정에 여분의 하루를 더하니 총 6일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주말을 끼고도 최소 4일의 휴가가 필요했다.

 

 이제 겨우 신입티를 갓 떼어낸 2년차 사원에게는 4일이나 되는 휴가를, 그것도 쌩뚱맞은 3월에 쓴다는게 조금 눈치보이는 일이었다. 눈 딱 감고 휴가 신청서를 들이 밀었다. 혹시 몰라 당당하게 휴가사유란에는 '자전거 국토종주'라고 적었다. 결과는 다행히도 오케이. 이렇게 해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출발하는 일만 남았다.

 

4박 5일의 여정을 함께할 나의 든든한 동지, 잘 부탁하오!

 

 여정에는 5년 가까이 호흡을 맞춘 티티카카 스피더스 2010년식이 함께하기로 했다. 그시절 나름 학생 주머니 사정치고는 4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질렀던 자전거다. 여지껏 잔고장 한 번 없이 3000km 가까이 잘 타고 있다. 다만 요즘은 미니벨로 유행도 시들해지고 고가의 자전거가 흔해지다 보니 조금 초라해 보이기는 한다. 그래도 이만큼 믿음직한 동지가 또 어디있으랴. 원래 먼길 떠나기 전에는 새 신발을 신지 않는 법이다. 출발 전날 샵에 들러 간단히 브레이크과 타이어 상태를 점검받고 그대로 짐받이만 달아 준비를 마쳤다.

 

출발하기 전 무사 귀환을 바라며 자전거 증명사진 한 장!

 

3월의 강바람은 매서웠다. 자전거 타기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조금 쌀쌀한걸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먼저 도착해서 이리저리 몸을 풀고있으니 곧 Y가 도착했다. 지난 아라뱃길 라이딩에서 처럼 Y 역시 나와 바퀴 사이즈가 같은 미니벨로를 타고 함께 하기로 했다. 출발지가 인천 아라갑문이 아니라 안양천 합수부인 이유는 지난 테스트 라이딩에서 이미 앞쪽 코스를 달려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토종주 인증수첩의 세 번째 체크포인트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부터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리 찍어둔 두 개의 도장에 이어 세번째 체크 포인트부터 시작한다

 

슬슬 페달을 밟다보니 어느새 첫번째 체크 포인트 여의도에 도착했다. 지난 글에서도 잠시 설명했지만 자전거 국토종주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사진 속 여권처럼 생긴 '인증수첩'에 정해진 체크 포인트마다 스탬프를 찍으면서 진행하면 된다. 체크 포인트는 보통20~30km마다 있어서 이에 맞춰 페이스를 조절하고 보급이나 식사, 숙박 등을 정하면 편리하다.

 

 스탬프는 체크포인트에 마련된 빨간 공중전화 박스 안에 상시 비치되어있다. 스탬프와 함께 잉크가 놓여있는데 하도 람들이 많이 이용하다 보니 뚜껑을 닫지 않아서 잉크가 말라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예쁘게 도장을 찍고 싶다면 손 끝에 체중을 싣고 빙그르르 돌리듯 눌러주면 된다. 4박 5일 내내 도장을 찍어서 그런지 찍는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양갱을 챙길땐 종이 박스를 벗겨 부피를 줄이는 것도 요령이다

 

한강 철교를 지날 무렵부터 드디어 해가 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꿀꿀한 날씨에 시무룩했던 기분이 한결 괜찮아 졌다.

 

 우리의 팀닥터 Y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것 처럼 행동식을 한 꾸러미 가득 들고 왔다. 하루에 100km 이상 여러날을 타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 마다 열량 보충을 잘 해줘야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는 배가 고프기 전에 먹고, 목 마르기 전에 마셔야 한다고 했다.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징후가 몸에 나타나면 이미 늦었다는 뜻이다. 초콜렛, 사탕, 양갱, 파워젤 등 여러가지 행동식이 있지만 지방함량이 없고 탄수화물과 단백질, 당류로만 이루어진 영양갱이 구하기도 쉽고 가장 효과가 좋다. 국토종주 인증 코스를 달리다보면 의외로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강가를 오래도록 달려야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별다른 계획없이 편의점이 보이면 사먹어야지 하다간 봉크(bonk, 에너지를 다 써서 근육이 풀어진 상태, 즉 퍼지는 것)가 되어 남은 일정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잠실철교, 지하철과 나란히 달리는 기분이 나름 괜찮았다

 

 어느새 반포대교를 지나 뚝섬 근처에 도착했다. 이 근방에는 뚝섬 전망 콤플렉스(북단)와 광나루 자전거 공원(남단) 두 곳의 인증센터가 있는데 한강 남북단을 쉽게 오가기가 어렵다보니 둘 중 한 곳만 찍어도 종주 인증엔 문제 없다고 안내되어있었다. 하지만 이왕 스탬프를 모으기로 한 김에 빈칸을 남길수는 없었다. 먼저 북단을 달리다가 뚝섬을 찍고, 잠실철교를 타고 남단으로 내려와 광나루를 거쳐 팔당대교에서 다시 북단으로 넘어가는 계획을 세웠다. 수도 없이 달려본 한강 자전거 도로지만 막상 인증 스탬프를 하나씩 찍으며 진행하다보니 무슨 게임 속 퀘스트라도 깨 나가는 것 같아 나름 재미있었다.

 

 계획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잠실철교를 자전거 타고 건너보게 되었다. 서울 서쪽에 살다보니 잠실철교는 지하철로도 몇 번 와본적이 없는 생소한 곳이다. 그냥 지하철만 달리는 철교인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전거 도로가 시원하게 놓여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잠수교 만큼이나 자전거가 다니기 괜찮은 편이었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제법 한산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광나루 인증센터를 지나 조금만 더 달리면 금새 서울과 하남시의 경계를 넘게된다. 아스팔트로 잘 닦여있던 길은 여기서부터 뭔가 어수선하게 포장상태가 변한다. 인증 스탬프를 다 모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강 남쪽으로 달렸지만, 포장상태로 봤을땐 북단으로 가는게 정답이다. 혹시나 스탬프에 욕심이 없다면 뚝섬부터 계속해서 북단으로 달려 양평까지 가는 길을 추천하고 싶다. 남단의 길은 팔당대교에서 끝이나는데 팔당대교를 건너기 위한 진입로도 조금 복잡해서 되어있어 살짝 헤멧던 기억이 난다.

 

자전거 동호인들은 다 안다는 그 음식, 팔당 초계국수

 

  국토종주 첫날 점심메뉴는 시원한 초계국수로 결정했다. 알고보면 수도권에서 자전거를 타는사람들이라면 여러번 먹어봤을법 한 인기 메뉴다. 날씨좋은 봄가을에는 식당 앞에 자전거 발렛 파킹 전담 직원이 있을 정도다. 고가의 자전거가 대중화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신종 문화다. 몇 번 가다보니 자전거를 건네주고 번호키를 받는게 익숙해졌지만 나에게도 처음엔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울 근교에서 자전거를 타다보면 정말 미묘하게 이 초계국수집 근처에서 배가 고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실제로 음식도 꽤 맛있는 편이라 한 번쯤 찾아가 먹어볼 법 하다. 식초로 양념한 닭고기를 얹은 국수라 해서 초계국수라 이름붙었는데, 이게 마치 超界(초월할 초, 경계 계) 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빠르게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 먹기 참 괜찮은 음식이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어쨌거나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쌀밥에 비해 몸에서 에너지로 변환되는 속도가 빨라 좋은 보충식이다. 뚜르 드 프랑스에 참가하는 선수들 중에선 경기중에 아예 피자나 파스타를 정식 식단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덜컹덜컹, 목재 데크가 놓은 철교를 자전거로 건너는 기분이란!

 

팔당 초계국수집을 나오면 한강 자전거 도로의 백미, 중앙선 폐철로 구간이 나온다. 복선 전철이 놓이며 폐선된 중앙선 철로를 따라 두물머리 까지 멋드러진 자전거길이 펼쳐진다. 나름 디자인 개념도 있어서 폐철로를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군데 군데 조경요소로 사용한 점도 인상 깊다. 아무래도 뉴욕의 하이라인을 많이 참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조안면, 능내역을 거쳐 두물머리 근처까지가 가장 풍경이 멋지다. 서울에서도 가깝고 교통도 잘 되어있어서 꼭 자전거가 아니더라도 길을 따라 걷는 연인들도 많이 자주 보인다. 특히 추천하고 싶은 포인트는 단선 철도를 위해 뚫어놓은 터널을 지나가는 구간이다. 좁고 긴 터널을 따라 시원하게 자전거를 타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양수대교 옆으로 나란히 지가나는 철교도 아주 운치있다. 근처에 자전거를 대여해주는 곳도 꽤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달려보시라. 두 번 추천하고픈 멋진 길이다.

 

혼자가 아니다보니 서로의 몸상태를 확인하고 호흡을 맞추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후 양평을 거쳐 여주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길이 이어진다. 양평 군립미술관 근처를 지날때는 시내로 살짝 이어지는 길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고, 다시 강쪽으로 빠져나와서는 갑작스레 나타난 긴 오르막에 긴장하기도 했다. 양평 시내를 빠져나올 즈음에는 같이 달리던 Y가 갑작스레 다리에 통증을 호소해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장시간 페달을 밟아서 근육이 놀란 모양이었다. 강가 벤치에 앉아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뒤  전열을 재정비해 최종 목적지를 향해 힘껏 페달을 밟았다. 어느새 하늘을 서서히 오렌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멀리 이포보가 보인다. 길이 좋아 원없이 속도를 내보았던 구간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여주의 할머니댁이다. 보통 정식 코스대로 인천 서해갑문에서 출발하면 양평에서 숙박을 하거나 조금 더 가서 여주 시내에서 숙소를 잡는게 보통이다. 마침 친할머니 댁이 이포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올커니 하고 첫날 숙박지로 잡았다. 다만 할머니께서는 몸이 조금 편찮으셔서 서울에 올라와계시는 중이라 할머니 안계신 할머니댁에서 우리끼리 하루를 묵게 되었다.

 

 

 

썩 마음에 드는 배경은 아니지만... 인증샷 삼아 한 장

 

 녹조라떼며 큰빗이끼벌레며 유난히도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던 이포보다. 자전거 국토종주 인증제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4대강 사업과 연관되어있는지라 앞으로도 수 없이 많은 '보'들을 지나쳐야만 한다. 실제로 코스를 따라 꽤 많은 인증센터가 무슨무슨보 라는 이름을 달고 되어있다.

 

 알수 없는 괴상한 모양새의 조형물이 아무래도 영 보기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무수한 보들 중 이포보가 그나마 제일 신경 쓴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얼마전에 다녀온 금강 종주에서 만난 보들은 더욱 가관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어쨌거나 여기서 오늘의 마지막 스탬프를 찍었다. 최초 출발지인 안양천 합수부에서 부터 약 100km 정도 되는 지점이다.

 

 

 

 

자전거로 100km를 달리고 먹으니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이포보에서 국도를 타고 읍내까지 조금 더 들어와 할머니댁에 도착했다. 첫날 일정으로는 꽤 괜찮은 거리 배분이었던것 같다. 아직 여정이 많이 남았지만 무사히 첫날을 마무리한 기념으로 삼겹살에 맥주를 한잔 하며 자축의 시간을 가졌다. 기억에 그당시 돼지고기값이 하도 비싸서 소고기 뺨치던 시기였지만 아무렴 어떠랴. 오랜만에 어디 엠티라도 온 대학생들처럼 신나게 먹고, 마시고, 그렇게 수다를 떨었다. (계속)

 

주행거리 116.8km, 주행시간 6시간 12분, 평균속력 18.8km/h, 최고속력 49.1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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