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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옅은 오렌지빛 암모나이트가 곳곳에 남아있는 도시. 단테와 바이런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따라 찾아왔고, 베르디의 오페라를 고대의 경기장에서 관람할 수 있는 특별한 곳.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로마, 피렌치, 베네치아 다음으로 많이 찾는 도시.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본다는 가이드북에서 인용해온 베로나에 대한 설명이다. 설명만 보면 정말이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꼭 들러야 할 도시처럼 되어있지만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그저 처음 들어보는 도시일 뿐이었다. 사실 베로나에 들르게 된건 순전히 긴 여정을 잘라 가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딱히 보고 싶은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원래 알던 도시도 아니었다. 그저 바닥에 지도를 펼쳐놓고 베네이차에서 친퀘떼레(Cinque Terre)로 가는 길 한 가운데를 찍으니 그 곳이 바로 베로나였을 뿐. 그래서 들르기로 했다.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다니는 것도 물론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마음가는 대로 움직여 보는 것도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이건 몇 년전 인도에서 얻은 여행의 지혜다.


아침 일찍 베네치아를 출발해 베로나로 향했다


 베네치아에서 간단히 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베로나행 열차에 올랐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잠깐 눈 붙일 새도 없이 베로나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역에 도착했다.

 5년전 여행 했던 이탈리아를 다시 찾은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베네치아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서. 또 하나는 이탈리아 북서부 해안의 친퀘떼레(Cinque terre)를 여행하고 싶어서다. 동부 해안인 베네치아에서 서부 친퀘떼레까지는 순수한 거리로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교통도 불편해서 찾아가는게 쉽지가 않다.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밤새도록 기차와 버스를 여러번 환승해서 가는 피곤한 루트. 어차피 밤기차를 타고 시작하는 여정이기에 우리에게는 한나절 여유가 있었고 부담없이 베로나라는 도시를 걸어보기엔 꽤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이탈리아에선 아무 피자나 다 맛있는것 같다


 아침에 먹은 케밥이 조금 부실했는지 금새 또 배가 고파서 간단히 요기를 좀 하기로 했다. 피자와 파스타의 본고장 이탈리아라지만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는 맥도날드 햄버거보다 싼 즉석 피자 한 쪽이면 충분하다. 다행히 한국에서 몇 만원 주고 먹는 피자보다 맛있기에 이탈리아는 배낭여행하기 즐거운 나라다.



베로나 신시가지를 가로질러 구시가지로 가는 길


 어느새 세계일주도 7개월차로 접어들고 있는 여행메이트 현재. 조금만 걸어도 툴툴대는 나름 까다로운 여행자지만 오늘은 내가 고집을 좀 부려서 많이 걷기로 했다. 베로나 포르타 누오바 역에서부터 구시가지 까지는 걸어서 30여분 정도. 기차역이 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지 구시가지까지 이르는 동안 별달리 볼거는 없다. 어차피 밤기차 시간까지 여유도 있고 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계속 걸었다.



이탈리아는 하늘이 맑아서 빛도 참 좋다


 베로나의 신시가지는 별다른 특색이 없다. 가이드북에 써있는 '옅은 오렌지빛 암모나이트가 곳곳에 남아있는 도시 베로나'는 어디에 있는걸까 의아해하면서 걸었던것 같다.


여기서부터 진짜 베로나!


 그렇게 30여분쯤 걸으니 브라 광장으로 들어가는 성벽 입구에 도착했다. 진짜 베로나는 이 문을 통과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다른 중세 도시들이 성벽으로 완전히 둘러쌓여 있는것과는 달리 베로나의 구시가지는 북쪽으로 아디제강이 감싸 앉으며 흐르고 있어서 남측에만 성벽이 있다. 성벽을 이루고 있는 붉으스름한 벽돌은 베로나 지방에서 나는 '로소디 베로나'라고 불리는 석회암이라고 한다. 중세의 구시가지들은 그 지방의 토착 재료를 사용해 건축한 경우가 많은데 베로나 역시 이 돌로 쌓아올린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래나에서 뻗어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메가스트럭쳐(?)


 베로나의 중심인 브라광장에는 아레나가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축소해놓은듯한 모습의 원형 경기장은 현재 발레와 클래식 공연이 열리는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무대로 이용되고 있다. 재미있는건 2000여년 전 로마인들이 설계한 이곳이 음향학 적으로 너무 완벽해서 지금도 별다른 장치없이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연장 설계에서 음향학은 지금도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세밀하게 다뤄야 하는 분야이기에 더욱 신기하다.




쇼핑거리에선 눈으로만 즐기고 패스!


 브라 광장에서부터 북쪽의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까지는 '마치니 거리(Via Mazzini)'로 연결된다. 일명 쇼핑거리로 알려진 곳인데 프라다 같은 명품 매장도 몇 개 있고 그렇다. 우리같은 배낭여행자에겐 별 해당사항이 없으니 가볍게 패스.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모여서 구시가지의 스케일감을 만들어낸다


 마치니 거리를 계속해서 걸으면 시뇨리 광장, 에르베 광장을 지나 아디제 강가에 위치한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까지 이어진다. 평범한 성당이지만 구시가지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이정표 삼아 끝까지 걸어왔다. 대부분의 유럽 구시가지들 처럼 베로나의 구시가 역시 비교적 평탄한 지형이다. 차도 별로 없고 길도 인간적으로 적당히 좁으니 무념무상으로 찬찬히 걸어보기엔 이보다 더 좋은 도시가 어디 있을까. 나름 볼거리가 많은 도시지만 그보다는 그냥 걷는 일에 더 집중했던것 같다.



베로나 최대의 관광지, 줄리엣의 집


 관광 포인트는 몇 군데 안들렸지만 이곳 만큼은 빼놓으면 섭하다. 에르베 광장에서 골목을 따라 서쪽으로 백 여 미터만 걸으면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오래된 집이 하나 서 있다. 일명 '줄리엣의 집'이다. 줄리엣의 실제 가문인 캐풀렛이 실제로 살았던 곳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혹시 동화같은 사랑, 아름다운 전설을 믿고 싶은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들이 '줄리엣의 집'을 아직도 찾게 만드는건 아닐까.

발코니에 서있는 줄리엣과 세레나데를 부르는 로미오를 상상해보시라!


 역사적 사실이 없다고는 해도 나름 영화같은 장면을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다. 사진 속에 보이는 발코니가 바로 로미오가 줄리엣을 향해 세레나데를 불렀다는 그 발코니다. 마당 한 켠에는 줄리엣의 동상도 하나 서 있는데, 왼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어디서 유래된 전설인지는 모르겠으니 동상의 가슴에 이미 반질반질 윤이 나는걸 보면 꽤 믿을만 한 소문인가보다.







에르베 광장에는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파는 장이 서 있었다


 줄리엣의 집에서 나와 에르베 광장에서 시간을 좀 보냈다. 과거 약초시장이 열리던 곳이라 '에르베(Erbe)'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침 조그만 장이 서 있길래 이것저것 구경도 좀 했다. 베테랑 여행자 현재는 30여분을 고민한 끝에 5유로 짜리 맥가이버 칼을 하나 구입했다.



추운 겨울날, 성당은 여행자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준다


 광장을 잠깐 둘러보는 사이에 어느새 캄캄한 어둠이 내렸다. 옷을 좀 얇게 입고다녔더니 손발이 꽁꽁 얼어버렸다. 몸도 좀 녹일 겸 두오모에 들어가 주님의 은총(?)으로 카메라 배터리도 충전하기로 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비슷비슷해 보이는 성당들에 쉽게 실증을 느끼기 십상이다. 하지만 365일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성당들은 이렇게 여행자의 집이 되어주고, 쉼터가 되어준다.




아침에도 피자, 저녁에도 피자, 에헤라디야 여기가 정말 이탈리아로구나!


 슬슬 기차시간이 다가온다. 베로나에서 친퀘떼레 까지는 꽤 먼 여정이라 저녁도 해결해야 하고 야식도 준비해야했다. 야식으로는 맥도날드에서 1유로짜리 햄버거를 사두었고, 저녁을 뭘 먹을까 두리번 거리다가 허름해보이는 피자집을 찾아 들어갔다. 모로코에서 온 인상좋은 청년이 운영하는 피자집인데 손님이 우리뿐이라 이런저런 수다도 떨고 주방에 들어가서 레시피에 훈수(?)도 좀 뒀다. 덕분에 싼 가격으로 맛있는 피자와 파스타를 실컷 먹었다.


환승 일정표만 봐도 그때의 힘든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과연 이 둘의 운명은?


 열심히 걸어서 다시 아침에 내렸던 베로나 포르타 누오바 역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밤새 무려 네 번을 환승해야 하는 친퀘떼레까지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과연 이 무지막지한 여정을 잘 버티고 내일 아침 친퀘떼레에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것인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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