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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날 아침이 밝았다. 어느덧 독일에 온 지도 나흘째지만 빡빡한 학교 수업에 시달리던 마드리드에서와는 달리 딱히 할일이 정해지지 않은 편안한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독일에서의 시간은 더욱 느리게만 흘렀다. 날씨도 한 몫 단단히 했다. 파란 하늘과 쨍한 햇살이 익숙한 마드리드와는 달리, 어딘가 우중충 하면서도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뒤셀도르프의 하늘은 늘 멈춰있는것만 같았다.

크리스마스 이브. 부엌 발코니에 나와 둘러본 주변 풍경


 독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란 우리나라의 설날과 견줄 만큼 큰 명절이다. 유럽에 오기 전까지는(더욱 정확히는 파울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전까진) 몰랐지만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란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더라. 그런 점에서 난 참 행운아다. 멀리 마드리드에서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낸것도 과분한데 독일의 가정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게 되다니! 우리나라에선 크리스마스가 그저 연인들의 날, 혹은 상업적인 의미가 더 짙어져 버렸기에 이 곳에서의 크리스마스는 더욱 특별하게만 느껴졌다. 

과연 이 보자기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러고보니 파울네 집 거실 한 켠에는 내가 처음 도착한 날 부터 이렇게 천으로 가려진 뭔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위한 물건들이라 절대 열어봐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던 파울네 어머님. 내내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오늘 저녁이면 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수 있으리라. 


오랜만에 꾸며보는 크리스마스 트리,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의 하루 일과는 트리 만들기로 시작됐다. 보통은 12월 한 달 내내(길게는 1월 말까지) 거실 한 가운데 크게 만들어 놓는게 정석이지만 올해는 조금 늦어졌단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트리가 아닌 진짜 나무에 트리를 장식해보는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원에서 정말 나무를 베어다 만드는건 아니고 저렇게 트리용으로 따로 파는 나무들이 있다.






다들 트리를 꾸미는데 푹 빠졌다


 건축학도 셋이 달라붙어 트리를 꾸미니 순식간에 가지에 주렁주렁 뭔가 많이 달렸다. 확실히 크리스마스가 중요한 명절이다 보니 트리를 장식하기 위한 물건들도 종류별로 참 많다. 다 만들고 나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조금은 썰렁해 보이던 거실이 트리 하나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껏 난다.


자, 크리스마스의 만찬은 이 슾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나라에도 명절만 지나면 꼭 살찐다는 소리가 있듯이, 여기도 크게 다르진 않다. 크리스마스는 그 중에서도 먹고, 먹고, 또 먹는 일의 연속이다. 파울네 집의 공식적인 크리스마스의 첫 식사는 이브날 점심부터 시작된다. 매년 이 시간이면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사진 속의 슾을 먹는다고 한다. 소고기로 국물을 내고 거기에 계란 찜 비슷한 건더기와 야채가 들어간 맑은 슾인데, 얼핏 보면 토란국이랑도 비슷하다. 토란국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한국의 명절 생각도 나고 그랬다.



정말 오랜만에 성탄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렇게 맛있는 점심을 마치고 저녁 6시 무렵 집 근처의 교회를 찾았다. 우리나라의 성탄예배는 보통 더 늦은 저녁이었던것 같은데 여기선 조금 빠른 모양이다. 그리 크진 않지만 나름 파이프 오르간까지 갖춘 교회에는 벌써 사람들로 가득하다. 평소에 교회에 잘 안다니던 사람들도 이 날 만큼은 약속이라도 한 듯 교회에 모인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이게 얼마만에 성탄 예배인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니 가슴속이 따듯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성탄 노래들은 언어와 국적을 넘나드는 뭔가가 있나보다


 독일어로 진행되는 예배의 내용을 알아들을리가 만무했지만 다행히 주보에 찬송가 가사가 적혀있어서 열심히 따라 불렀다. 음절이 딱딱 끊어지고 똑 부러지는 스페인어 발음과는 달리 독일어는 뭔가 여운이 남는 발음이 많다. 독일어는 발음이 딱딱해서 노래부르기 안좋은 언어라는 말도 있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1절부터 4절까지 그렇게 모든 노래를 열심히 독일어로 따라 '읽으며' 예배를 마쳤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을 붙였다


 한 시간여의 성탄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만찬 준비에 다들 분주해졌다. 어머님께서는 아껴두었던 비싼 그릇을 꺼내시고 우리는 테이블 세팅을 열심히 도왔다. 오전에 만들어둔 크리스마스 트리에도 불을 밝혔다.


노래하지 않는 자에겐 식사도 없다!


 노래와 춤을 사랑하는 파울네 어머님께서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식사를 주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시며 먼저 선창을하셨다. 그렇게 다 같이 식탁에 둘러서서 성탄 노래만 대 여섯곡을 불렀다. 성탄 노래라는게 대부분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자기나라 말로 번역한 경우가 많아 중간에는 한국어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도 같이 불렀다. 마음이 참 따듯해지는 크리스마스 풍경이다. 작은 촛불들이 올려진 식탁, 커다란 트리 앞에 둘러서서 다같이 노래를 부르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가족들의 모습. 우리나라도 설날이나 추석 노래가 따로 있어서 다같이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너무너무 X100 맛있었던 소세지


 오늘의 저녁 만찬 메뉴는 매쉬 포테이토와 사워크라우트(Sauerkraut, 독일식 양배추 김치)를 곁들인 독일식 소세지 구이다. 한국에서도 독일식 소세지를 참 좋아했었는데 이날 정말 배가 터지도록 원없이 먹었다.

보자기 속에는 알고보니 크리스마스 선물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공개된 보자기 속 물건들의 정체! 바로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테이블 한 가득 쌓인 선물 꾸러미들에는 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씩 쓰여 있다. 사실 이 꾸러미들 속에는 내가 파울네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들도 숨어있다. 마드리드에서 독일에 오기전 파울에게 얘기를 듣고 작은 선물을 하나 준비해왔었다.






다들 자기 선물을 뜯어보느라 정신없는 모습


 이 곳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꼭 아이들만의 차지가 아니다. 다같이 선물을 나누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문화가 참 부러웠다. 이런 식이라면 백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도 매 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니 말이다. 멋진데?!

 이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서너개 씩 선물을 받았다. 파울네집 남자 셋은 각자 새 스마트폰도 생겼다.



기대도 안했던 크리스마스 선물에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이건 내가 받은 선물들이다. 킬립피치(Killepitsch, 뒤셀도르프의 전통술)는 전에 마드리드 파울네집에서 몇 번 먹어보고 홀딱 반했던 술이다. 독일에서도 오로지 뒤셀도르프에서만 파는 전통술이라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딱 내 이름이 써있는게 아닌가. 기대도 안했었는데 너무 멋진 선물을 받아 그저 고마운 마음 뿐이었다. 물론 모든 선물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주신걸로 친다. 그 외에도 스포츠용 양말과 이탈리아 살라미까지 받았다. 진짜 풍성한 크리스마스다!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크리스마스 풍경중에서 단연 최고였던!


 선물을 뜯어보느라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파울네 집이 있는 뒤셀도르프의 서쪽 마을에는 특별한 크리스마스 풍습이 있다. 겉옷을 챙겨입고 다시 밖으로 나가 도착한 곳은 저녁때 성탄 예배를 드렸던 작은 교회 앞. 깜깜한 한밤중이지만 교회의 종탑에는 밝게 불이 켜져있고 아름다운 브라스밴드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알고보니 수 십년 전 부터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이면 이 마을 종탑 위에서 브라스밴드가 30분간 연주회를 가져왔다고 한다. 특별히 돈을 받거나 하는 공연이 아니라 그냥 마을 사람들 모두를 위한 자발적인 공연이라고 했다. 이제는 마을의 전통처럼 자리잡아 매년 12월 24일 자정이면 마을사람들이 다같이 교회 앞으로 모여 서로 성탄 인사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정말 영화 속에서나 있을법한 너무나 낭만적이고 멋진 전통이다. 그렇게 밤하늘 위로 울려퍼지는 브라스 밴드의 선율에 취해 독일에서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아름답게 지나갔다.




다음날 역시 먹고, 또 먹는 일의 연속! 아이 좋아라


 종탑에서 울려퍼지던 브라스밴드의 선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크리스마스 당일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는 가족끼리 모여 함께 식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고 한다면 오늘은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이 다 함께 모이는 날이다. 독일 각지에서 모여든 파울네 친척들로 아침부터 집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오늘의 점심 만찬은 감자 슾과 생선 크림 파스타, 그리고 돼지고기를 곁들인 야채 오븐 구이다. 어제 그렇게 배불리 먹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니 다시 군침이 줄줄 흐른다.

이름에서 'u'가 하나 빠졌지만 그래도 좋다!


 오늘은 또 다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나 더 받았다. 선물에 적힌 내 이름이 살짝 틀려서 더 깜찍한 그런 선물. 재미있는건 나도 파울네 친척 아저씨 선물로 '크리스마스 차'를 준비했는데 나 역시 '차'를 선물로 받았다. 이 차는 지금 블로그를 쓰며 감사히 맛있게 잘 마시고 있다.





이날 저녁은 손님인 우리가 한국음식을 대접했다


 어제 너무나 멋진 저녁 만찬과 추억을 만들어준 파울네 가족들에게 보답하고픈 마음에서 이날 저녁식사는 나와 우린이가 요리를 자청했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는 호박볶음, 계란찜, 그리고 닭볶음탕. 혹시나 매운 음식을 별로 안 좋아하면 어떡할까 걱정도 했었지만 모두들 너무나 맛있게 먹어주어 기분이 참 좋았다. 파울네 어머님은 심지어 닭볶음탕의 레시피를 따로 적어가셨다.

 겨우 단 이틀간의 크리스마스지만 그새 살이 부쩍 찐 느낌이다. 독일식 소세지와 한국식 닭볶음탕이 공존하는 뒤셀도르프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아마 내 평생 가장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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