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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에 온 이후 처음으로 1박 이상 일정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정확히는 2박3일. 어느새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정이 들어버린 방을 떠나 여행을 떠나려니 정말 이제는 여기가 '내 집'이구나 하는게 새삼 느껴졌다. 원래 사라고사에 가게 된건 단순히 여행을 목적으로 한게 아니었다. 지난주 주말은 '사라고사 바이크 폴로팀' 주최로 열리는 '사라고사 바이크 폴로 대회'가 있는 날이었고, 우리 '마드리드 바이크 폴로팀'은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강도높은 트레이닝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결전에 날이 다가왔다. 키도 조그만 동양인 꼬마인 내가 멀리 스페인에서 '바이크 폴로'라는 인디씬에 몸을 담고 있는 지금의 모습도 아직 잘 실감이 안나지만, 팀원들과 함께 멀리 사라고사까지 가서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더욱 설레었던것 같다.

당일치기 여행만 하다가 이렇게 짐을 싸려니 어색하기만 하다


마땅히 여행용으로 쓸만한 가방이 없어 전날 진원이네 집에 가서 배낭을 하나 빌려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2박3일 일정이라고는 하나 막상 가져갈 옷가지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사진을 찍기 위한 카메라 한 대, 비디오를 담기 위한 다른 카메라 한 대, 그리고 폴로 스틱 같은 잡다한 물품들이 더 많았다. 내가 가진 두 개의 폴로 스틱 중에서 그나마 손에 익은 하나를 고민끝에 골라들고 집을 나섰다. 


사라고사까지 함께갈 Sebastian의 자전거 가게


 사라고사(Zaragoza)는 마드리드에서 북동쪽으로 30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아라곤 주의 주도일 정도로 나름 규모가 있는 도시다. 스페인이 한국보다 워낙 크다 보니 300km면 마드리드에서 그렇게 먼 도시는 아니지만, 한국으로 생각하면 풍경도, 문화도, 모든게 다를 법한 나름 '외지'다. 

 마드리드 바이크 폴로 팀은 각자 차를 나누어 타고 사라고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Sebastian 차를 얻어 타고 가기로 했다. 저녁 아홉시 쯤, 레띠로(Retiro) 공원 근처에 있는 Sebastian의 가게로 찾아갔다. 독일태생이지만 스페인 여자친구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살고 있다는 이친구는 By bike라는 자그마한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가 '바이크 폴로 팀'이긴 하지만, 알면 알 수록 생각보다 많은 팀원들이 자전거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신기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사라고사로!


 출발 전, 가게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을 공짜로 챙겨주고 내 자전거에는 문제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주는 Sebastian. 사라고사 까지는 차로 세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하니 지금 출발해도 영락없이 밤 12시에 떨어지게 생겼다. 잠은 어디서 자는지 안그래도 궁금했는데, 침낭이나 매트 같은거 안가져왔냐고 먼저 물어본다. 호스텔 같은데서 자는 줄 알았는데 일종의 '합숙'을 하게 되는 모양이다. 다행히 Sebastian에게 남는 침낭이 하나 있어서 내 몫까지 챙길 수 있었다.




저 네비게이션을 믿은게 실수였지...


 하룻밤 이상 일정으로 떠나는 여행도 여기서 처음이지만, 외국 친구와 차를 타고 가는 것도 당연히 처음이다. 세 시간 넘도록 운전해야 하는 사람은 피곤하겠지만, 난 조수석에서 마냥 신이 났다. 저녁으로 미리 엠빠나다(Empanada,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전통 파이 종류)를 챙겨와 함께 나누어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사실 바이크 폴로 팀 친구들이랑 경기장에서나 잠깐씩 만났었지 길게 얘기해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함께 차를 타고 사라고사로 향하는 길은 더욱 즐겁게만 느껴졌다.


사라고사까지 가는 내내 120km 이상 밟았다, 도로에 차가 하나도 없는 걸!


 150km, 절반쯤 와서 잠깐 쉬어간 휴게소. 가는 내내 차창 밖으로 별이 하도 많아 눈을 떼질 못했었는데... 차에서 내려 조금 어두운 곳으로 가니 그야말로 쏟아질 듯 수 많은 별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평생 살면서 본 하늘 중에서 가장 많은 별이 보였던것 같다. 맨눈으로 은하수도 어렴풋이 보이고 성운도 구별할 수 있을 정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갈길이 멀기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쉽긴 하지만... Sebastian에게 물어보니 스페인은 원래 공기가 건조한 편이라 별을 관찰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별을 관측하기위한 지상 천문대도 스페인에 많이 세워져 있단다.


도착한줄 알고 자전거를 다 내려놓고 기다렸는데... 어째 이상하다


 다른 팀원인 Alvaro에게 빌렸다는 네비게이션 하나만을 믿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벌써 시간은 열두시를 넘어 한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자전거를 다시 조립하고 주위를 둘러 보는데... 어째 너무 시골이다. 인기척은 커녕 지나가는 차도 잘 없고 여기가 정말 맞게 찾아온건지 이상했다.  
 
 친구들이 알려준 목적지는 사라고사의 Calle de Doctor A. Palomeo. 분명 맞게 도착해서 삼십분 넘도록 친구들을 기다렸는데 어째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알고보니 사라고사'시'와 사라고사'지방'에 같은 지명이 있었던 거였다. 실제로 우리가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동네는 사라고사시에서 북쪽으로 5km나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전거를 분해해서 싣고 차에 올랐다.




'와!'하는소리가 절로 나오던 바이크 폴로인들만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한 오늘의 숙소는 사라고사 시내 중심에 있는 자그마한 공방(Taller)겸 바(Bar). 수 많은 지역에서 '바이크 폴로'라는 하나의 주제만으로 모여든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이번 대회를 주최하고 진행하는 '사라고사 바이크 폴로팀'이 특별히 마련한 숙소다. 바 한켠으로 가득 세워진 폴로용 자전거들, 한켠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 늦은 시간임에도 내일 대회를 위해 자전거를 손보는 친구들. 말 그대로 '바이크 폴로'라는 '인디 씬'의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출발도 조금 늦고 길도 헤메는 바람에 어느새 시간은 새벽 3시. 평범한 교환학생 신분에 그쳤더라면 평생 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멋진 분위기에 취해 흥분된 마음에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분위기는 멋있는 곳이지만 잠자리는 그닥 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짜로 하룻밤을 '합숙'하게 된 우리의 잠자리는 이렇게 생겼다. 위에서 말한 바의 지하에 위치한 큰 방인데 다들 침낭을 가지고와 발디딜 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자는 모습도 참 흥미로웠다. 모두들 내일 있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온 선수들이다. 사실 이날 잠을 많이 설쳤다. 밤늦도록 후레쉬를 켜고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어폰을 끼고 MP3를 틀긴 했었지만, 거의 한숨도 못잔것 같다. 이때의 피로가 사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조금 남아있는 것 같다.


아침 일찍부터 경기를 준비하느라 바쁜 손길들


 다음날 아침. 대회 당일이다. 오전 아홉시 반 부터 시작되는 강행군 일정때문에 8시에 일어나 후다닥 짐을 챙기고 숙소를 나섰다. 샤워는 커녕 머리도 제대로 못감고 이만 겨우 닦았다. 그렇게 처음 마주친 사라고사라는 도시의 골목길은 저마다 자전거를 끌고 골목길에 쏟아져나오는 바이크 폴로 선수들의 인상으로 더욱 강렬했다. '신기하다'라는 표현보다 더 잘 어울리는게 있을것 같지만... 어쨌거나 내 눈에는 이 모든게 계속 신기하고 또 신기한 풍경이었다.


츄ㄹㄹㄹ로스. Sebastian의 저 환한 미소를 보라!


 오늘의 아침 식사 메뉴는 '츄로스 꼰 초꼴라떼(Churros con Chocolate)'다. 좀 느끼해 보이지만 스페인에서는 흔히 아침으로 먹는 메뉴다. 전에 마드리드에서 먹었을땐 영 입에 안맞았는데 이날은 어찌나 맛있던지. 역시 전날 밤을 설치는 바람에 단게 좀 필요했었던것 같다.



널부러진 채 순서를 기다리는 우리팀 자전거들


 이틀간 '바이크 폴로 사라고사 대회'가 펼쳐지게 될 '브루일 공원(Parque Bruil)'은 마드리드 구시가지에서 살짝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이다. 아직 사라고사가 어떻게 생긴 도시인지도 모른 채 팀 친구들이랑 열심히 페달을 밟아 제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경기 초반, 날씨가 흐려 이때만 해도 좀 추웠다


 전에 '바이크 폴로 마드리드 대회'때만 해도 승패보다는 참가에 더욱 의의를 두던 가벼운 행사였는데... 이번 사라고사 대회는 느낌이 좀 달랐다. 스페인 각지의 팀은 물론이고 멀리 미국, 프랑스 등 외국 팀들까지 참가해 그야말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진짜 대회'였다. 바이크 폴로는 비교적 신생 스포츠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폴로 선수들을 보는 것도 진풍경 그 자체였다.








열심히 경기하는 우리팀 친구들의 모습! Venga chichos!


 바이크 폴로의 한 팀 정원은 세 명이다. 내가 속한 '마드리드 바이크 폴로팀'은 총 세 팀으로 나누어 출전했다. 난 교체선수 자격으로 함께 간거였는데 막상 경기를 지켜보고 있으니 이건 내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멀리 사라고사까지 힘들게 왔으니 한 경기정도는 참가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경기 중간에 우리팀 주장 Jorge가 '한 번 들어가 볼래?'하고 물어보긴 했지만 결국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긴 이제 겨우 경력 두 달 남짓한 내가 이렇게 큰 대회에서 플레이할 생각을 하는건 혼자만의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다고 마냥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지난번 마드리드 대회 이후 어느새 우리팀 내에서는 내가 '공식 사진가'처럼 불리고 있다. 이날도 역시 사진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 Benjamin과 제작하기로 한 영상까지 담느라 오히려 더 정신이 없었다.



모든 인디 스포츠들의 공통점? 일단 정치인은 까고 보는거다


 이날 대회에는 인디씬 특유의 재치가 묻어나는 재미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었다. 바이크 폴로 룰에서 다리가 땅에 닿았을 경우에는 경기장 중앙에 매달린 패드를 스틱으로 찍고 돌아와야 다시 플레이를 할 수 있는데, 사진 속 대롱대롱 매달린 동그란 철판이 바로 그것이다. 헌데 자세히 보면 사람 얼굴이 붙어있다. 바로 스페인 전 대통령과 총리의 얼굴이란다. 정치인들을 싫어하는건 한국이나 스페인이나 매 한가지인 모양이다. 이날 두 분(?)의 얼굴은 경기 내내 폴로 스틱으로 수도 없이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손수 제작했다는 Aitor의 바퀴 덮개의 센스!


 경기장 소품을 저렇게 꾸며놓은 '사라고사 바이크 폴로팀'도 웃기지만, 우리 마드리드 팀에는 더한 녀석도 있다. 바이크 폴로용 자전거는 공이 바퀴 사이로 빠지는걸 막기 위해 동그란 판을 휠에 덧대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사진속 자전거는 우리팀 Aitor의 자전거다. 앞뒤로 대통령 사진을 붙여와서는 이날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슈팅한 공이 Aitor 자전거 바퀴에 맞기라도 하면 환호성이 터져나올 정도! 

세계랭킹 2위의 프랑스 팀, 이건 뭐 차원이 다른 플레이다


 마지막으로 단연 이번 대회의 '스타'였던 세계랭킹 2위의 프랑스 팀의 모습이다. 바이크 폴로에 특별히 세계 랭킹이 따로 있는건 아니지만, 작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제 1회 세계대회'에서 이친구들이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실력은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 물론 우리 마드리드 팀과도 경기가 있었는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5:0으로 지고 말았다.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멋진 팀이었다.

 점심도 거른채 조별 예선 경기는 하루종일 진행됐지만, 난 2시가 넘어갈 무렵 자리를 살짝 빠져 나왔다. 어차피 경기에 참여는 못해도 충분히 즐겼고, 사진도 비디오도 만족스러울 만큼 얻은것 같아 사라고사 여행을 좀 해볼 요량이었다. 마침 내가 사라고사에 온다는 얘기에 우린이랑 형윤이도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사라고사에 도착해 먼저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있다고 했다. '마드리드 바이크 폴로팀' 신분으로 멀리 사라고사까지 왔지만 이제는 잠시 여행자 신분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아참, 바이크 폴로 대회 결과는 사라고사 여행기 마지막편에서 다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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