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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10월 3일은 '세계 주거의 날'이다. 아니, 그렇다고 한다. 사실 건축을 전공하고 있는 입장에서도 이런 날이 있었다는걸 잘 모르고 있었던게 사실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매년 이 맘때쯤 되면 '건축주간'이라는게 있었던 것도 같다. 특별한 뭔가가 있었던건 아니고 그저 설계수업이 한 주 쉬어가는 날 정도의 기억이랄까(어쩌면 뭔가가 있었는데 내가 무관심해서 몰랐던 것일수도 있다, 만약 그런거라면 반성해야 할 듯...). 어쨌거나 이 곳 스페인에서 만큼은 '세계 주거의 날'에 대한 존재감이 확실하다. 벌써 한달도 더 된 이야기지만 건축학도의 눈에는 상당히 인상깊었던 한 주 였기에 소개해볼까 한다.



건축주간(Semana de la Arquitectura)

 한국에서의 어렴풋한 기억과 비슷하게 이 곳 마드리드에서도 '세계 주거의 날'을 시작으로 일주일 동안을 '건축주간'이라고 부른다. 마드리드에는 '건축행사'만을 담당하는 관청이 있어서 '건축주간'동안 열리는 프로그램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가장 작게는 유명 건축가들이나 건축물,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하는 컨퍼런스(물론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된다), 마드리드의 의미있는 근현대 건축물들을 개방하고 가이드 투어까지 겸하는 개방행사, 멀리 지방 도시까지 버스로 함께 찾아가 가이드와 함께 거장의 건축물을 둘러보는 투어까지. PDF로 되어있는 '건축주간' 안내 유인물을 구해서 참고했었는데 하나하나 다 너무 좋은 프로그램들이라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학기중인지라 시간이 허락하는 안에서 몇 개만 다녀올 수 있었다. 컨퍼런스나 원정 건축물 투어는 참석할 엄두도 못냈지만, 마드리드 시내의 근현대 건축물을 개방하는 행사에는 총 세 곳을 다녀왔다. 이 때 개방되는 건축물들은 대부분 개인 소유의 건물들인데 날짜별로 정해서 딱 하루만 개방행사를 한다. 일 년 중에서 이때가 아니면 영영 들어가볼 수 없는 셈이다.




디자인보다는 그 역사와 의미에서 더욱 중요한 건물이다


까사 도 브라질(CASA DO BRASIL)

제일 먼저 찾아가본 개방 행사는 '까사 도 브라질'.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인데 매일 등하교길에 간판만 봤을 뿐 어떻게 생긴 건물인지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건물의 용도는 학교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중남미 교포들을 위한 일종의 '국제 중고등학교'라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 덕분에 꽤 유익했던 투어!


 건축주간 동안 열리는 개방행사에는 이렇게 가이드 투어를 공짜로 받을 수 있다. 원래는 외부인 출입 금지인 구역까지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가이드는 당연히 스페인어로 얘기하지만...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앞부분 설명을 못듣고 뒤늦게 합류했는데, 끝나고 개인적인 내 질문에도 친절하게 대답해주시는 가이드 할아버지 덕분에 무사히 투어를 마쳤다. 인상깊었던건 투어에 참가한 사람들의 연령층이 상당히 다양했다는 점. 나처럼 건축을 전공하거나 사진, 미술 등 예술쪽을 공부하는 학생부터 말 그대로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건축주간'에 열리는 행사인 만큼 짬을 내어 투어에 오신 노부부까지. 참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전에 한번 와본 곳이라 더욱 관심이 갔던, 꼰데 두께


꼰데 두께(CONDE DUQUE)

 두번째로 참여한 투어는 몬끌로아(Moncloa) 근처의 전시시설인 '꼰데 두께'였다. 사실 이곳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에 우린이랑 같이 네덜란드 조각가 ZITMAN의 전시를 보러 왔던 적이 있다. 그 때도 건물이 참 마음에 들어서 여기저기 관심있게 둘러봤었는데 이번엔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더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었다.


건축주간의 매력은 '일반인 통제 구역'에도 들어가볼 수 있다는 점!


 마드리드에는 '꼰데 두께' 처럼 옛 건물, 혹은 근대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전시시설로 쓰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로 전에 바이크 폴로 토너먼트가 열렸던 '마따대로(Matadero)'가 있다. '꼰데 두께' 역시 예전에는 병영 겸 막사로 쓰였던 군사시설이지만 지금은 전시도 열리고 재즈 페스티벌 같은 문화행사도 많이 열리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전에 전시를 보러왔을때 궁금해서 여기저기 물어봐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대신 가이드와 함께하는 투어 덕분에 지하 저장고 같이 옛 건물 용도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역이나, 아직 리모델링이 한창 진행중인 전시실 등 더욱 비밀스런(?) 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미 프로그램적으로는 수명이 다한 옛 건물들을 새롭게 재생시켜 문화시설로 사용하는 건 누구나 공감하는 참 멋진 아이디어다. 다만 그 아이디어가 실제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사실 내년 졸업설계을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이슈에 상당히 관심히 많이 가는 중인데... 그래서 더욱 인상깊었던 투어였다.



이곳은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진짜 '집'이다


까사 데 플로레스(CASA DE FLORES)

 건축주간 동안 돌아본 마지막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을 직역하면 '꽃들의 집' 정도 되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 날은 우연히 앞에서 형윤이랑 쏘냐를 만나 함께 투어에 참가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100% 알아들을 수 있으면 더 좋았으련만. 그나마 대충 알아들은 바로는 현재 마드리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집합주거의 원형이 되는 건물이라는것 같았다. 실제로 지금도 사람들이 사는 집합주거 용도로 사용되고 있고, 내가 살고있는 집이랑도 꽤 비슷하게 생긴 전형적인 건물이다.






다들 어찌나 설명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던지!


 옛날에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옥상 루프에는 특이한 시설물이 눈에 띈다. 마드리드의 강한 햇빛으로부터 실내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가짜 층'인데, 바람은 잘 통하면서 그늘을 만들어 달궈진 옥상 바닥의 열이 아랫층으로 내려가는걸 방지한다고 한다. 나름 상세도면까지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해주는 가이드 덕분에 더운 날씨에 땡볕에서도 열심히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건축주간'동안 오픈되는 건물들은 대부분 개인 용도로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딱히 유명한 건축가의 건물이거나 디자인이 멋진 작품들은 아니지만 건축학 적으로, 혹은 마드리드 도시의 문화와 역사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건물들이기에 내게는 꽤 흥미있게 보였다. 다만 건축에 큰 흥미가 없거나 평범한 관광객들에게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법 한 의외로 '전문적'인 프로그램이다. 그럼게도 인상깊었던건 말 그대로 '평범한 시민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내가 돌아본 세 곳의 건물들 모두 입구에서부터 긴 줄을 서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고, 투어를 마치고 나와도 여전히 건물 앞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일 정도였다. 
 이런 상황 자체가 너무나 멋져 보였다. 자신이 살아가는 마드리드라는 도시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 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서 있던 건물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이렇게나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게 아닐까. 건축이라는게 단순히 '건축가'들만의 작품세계가 되는것이 아니라 시민들에 삶 그 자체가 되기를 늘 희망하는 나로써는... 뭔가 멋진 해답을 살짝 엿본것 같은 짜릿한 경험이었다.





UPM 건축학과 졸업전시, 강렬했던 기억


 우리 학교 마드리드공과대학교(UPM) 건축학과에서도 '건축주간'에 맞춰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역시나 대부분은 컨퍼런스 위주의 프로그램들이었지만 아쉽게도 많이 듣지는 못했다. 다음학기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곧장 졸업설계를 해야하는 나기에 UPM 건축학과 학생들의 졸업작품(Proyectos Fin de Carrera)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아아 입이 잘 다물어지질 않았다. 물론 이곳 학생들은 졸업설계를 최소 1년에서 길게는 2년에 걸쳐 독자적으로 진행하기에 완성도가 당연히 높을 수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단했다. 사실 설계의 이슈나 디벨롭에서는 크게 인상깊지는 않았지만 작업량이나 디테일, 완성도가 학부 졸업설계라고 하기엔 너무나 대단했다. 일단 한 사람의 패널이 최소 A0 6장은 될 정도니 말 다했지... 그렇게 매일 등하교길에 로비에서 실컷 자극을 받으며 건축주간은 끝이 났다.





카드쌓기 모양의 독특한 전시 패널들, 사실 보기엔 좀 불편했다


스페인 건축/도시 비엔날레(Bienal Española de Arquitectura y Urbanismo)

 건축주간이 끝나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집 근처 누에보스 미니스떼리오스(Nuevos Ministerios)에서 건축/도시 비엔날레가 열렸다. 원래 모르고 있던 행사였는데 엘 에스꼬리알(El escorial)에 여행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린이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다녀온 전시였다. 건축주간의 행사는 아니지만 포스팅에서 함께 소개하는 이유는... 이정도 규모의 큰 행사가 '건축'이라는 하나의 주제만 가지고 열리는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건축을 주제로 하는 전시가 꽤 있다고는 하지만 마드리드에서 처럼 이렇게나 자주, 또 큰 규모로 열리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마침 내가 마드리드에 교환학생 와 있는 동안 이런 행사들이 열려주는 덕분에 배우는 학생 입장에선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수상작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고계신 박선생


 이날 전시는 크게 세가지였다. 먼저 지하 전시실에서 일종의 '건축대상 수상작 전시회'을 둘러봤다. 마드리드에서 지나다니며 본 적이 있는 건물들도 몇 있었다. 사실 수상작들의 모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패널들(심지어 입선작들은 읽을 수도 없게 이상한 방법으로 전시되어 있었지만) 뿐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유심히 살펴본것 같다. 스페인 사람들 눈에는 어떤 건축이 좋은 건축으로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심플하지만 어마어마한 인상을 주었던 최고의 전시!


 수상작 전시보다 더 큰 하이라이트는 바로 윗층에서 열린 'Aprendido de lo Vernáculo(평범한 집으로 부터 배웁니다)'라는 전시였다. 'Vernáculo'라는 단어는 '일반 주거 양식, 평범한 주거 양식'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서 세계 각국의 가장 일반적인 주거 양식들을 각종 도면과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행사였다. 모형 하나하나가 거의 사람 몸집만할 정도로 거대할 뿐더러, 아프리카 토속 부족부터 한국의 한옥에 이르기까지 정말 전시의 규모도 수준도 대단했다. 말 그대로 '가장 평범한게 가장 특별한 것'이라는 말이 새삼 느껴지는 전시였다.


참 반가웠던 한국의 '경포대' 모형


 수많은 모형중에는 우리나라의 한옥을 재현한 '경포대' 모형이 있어서 더욱 반가웠다. 함께 모형을 살펴보던 우린이는 기와를 하얀색으로 칠해놓은게 영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었지만, 꼼꼼하게 디테일까지 재현한 모형을 보며 나름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이 모형들과 자료들로 똑같은 전시가 한번 더 열렸으면 좋겠다 싶었다. 깜빡 모르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만한 멋진 전시였다!



내 방 벽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각종 포스터, 팜플렛들


 건축주간이며 여러 건축관련 행사들을 지켜보며 '역시 스페인은 아직 죽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기는 한데, 다시 말하자면 요새 유럽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떠오르며 여기저기서 무시받고 있는 스페인의 지금 상황에 비해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높은 수준의 모습을 보여주는게 놀랍다는 뜻이다. 특히나 아직까지도 전시공간에서는 미술이나 다른 예술에 비해 한창 입지가 부족한 '건축'을 가지고도 다채로운 행사와 프로그램을 뚝딱뚝딱 만들어내는게 인상깊었다. 게다가 그런 행사들에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함께 관람하는 모습은 더더욱.

 건축학도로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교환학생을 와 학교 수업을 통해서도 많은 자극을 받고 놀라지만, 오히려 이렇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들과 그 열정을 보며 더욱 많은걸 느끼는것 같다. 여기로 교환학생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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