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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나라, 혹은 도시 마다 한 번은 꼭 경험해봐야 할것같은 뭔가가 하나씩은 다 있다. 설령 별로 취미가 없는 분야라 할 지라도 일종의 통과 의례, 혹은 그 곳을 다녀왔다는 발도장 같은 거랄까. 예를 들면 런던 피카딜리의 오페라나 라스베가스의 카지노, 인도의 사막 투어, 아프리카의 사파리 같은 뭐 그런 것들.  그렇다면 스페인은? 바로 투우와 축구다.

 투우는 이미 시즌을 놓쳐 버렸다. 5년전 유럽여행을 하면서도 바르셀로나 투우장이 공사중인 바람에 못보고 지나쳐야만 했는데 이번에도 또 못보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하지만 가격도 비쌀 뿐더러 보고온 사람들이 다들 별로라는 소리를 하길래 흥미도 뚝 떨어져 버렸다. 딱히 아쉬움은 없다. 나중에라도 혹시 스페인을 다시 오게 되면 그때 볼까나.
 솔직히 말해서 축구도 나에게는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축구의 나라, 레알 마드리드의 본고장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일단 축구 얘기부터 꺼내며 부러워 하곤 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해외 축구에 별 관심이 없기에 그냥 무덤덤하게 맞장구 치고 말았었다. 마드리드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술집에 모여 축구를 보는 사람들이나, 경기가 끝나고 쏟아져나오는 축구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런 풍경을 매일 같이 접하면서도 '가봐야겠다'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Cony형이 내 몫까지 미리 예매를 해준 덕분에 이번주 화요일 챔피언스 리그 조별 마지막 경기, 레알 마드리드 vs 디나모 자그레브 전을 보러 가게 되었다. 

집에서 나와 베르나베우 경기장으로 가는 길

 
 레알 마드리드의 홈 구장은 '에스따디오 산띠아고 베르나베우(Estadio Santiago Bernabeu)'로, 아마 해외 축구 팬들한테는 꽤 익숙한 이름이지 않을까. 챔피언스 리그 경기는 저녁 8시 45분에 시작이지만, 친구들과 8시에 경기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서 7시 45분 쯤 설렁설렁 집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집에서 베르나베우 경기장 까지는 걸어서 딱 15분 거리다. 집 창문을 통해서 멀리 경기장 불빛이 보일 정도니... 하긴 이렇게 가까이 살면서도 축구 한번 안보고 교환학기를 마쳤으면 좀 아쉬울 뻔 했다.




벌써부터 경기장 앞은 북새통이다


 아직 경기 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지만 벌써부터 경기장 앞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축구 관람에는 큰 취미가 없는 나지만 마드리드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레알 마드리드 홈 구장에서 본다고 생각하니 슬슬 가슴이 뛰기 시작하더라.


두둥, 드디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앞에 섰다!


 드디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 무려 수용인원 8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한국에선 월드컵 이전 까지만 해도 축구 전용구장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역시 축구의 나라 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더 놀라운건 스페인에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보다 더 큰 구장이 바르셀로나에 있다는 사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오늘 처음 와본건 물론 아니다. 집 근처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섭도 몇 번 지나쳤었고, 한 번은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 인파에 떠밀려 옆 길로 피신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기분이 좀 남달랐다.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며 보는 거랑 정말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온건 다를테니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것 같다


 경기장 규모가 하도 크다보니 아예 주변 길들은 경찰이 통제를 하고 있을 정도다. 사진에는 소리를 담을 수 없어 아쉬울 뿐. 어찌나 사람들이 시끌시끌 하던지... 지켜보는 나 까지도 들썩들썩 할 정도였다.


이게 바로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 베르나베우 입장권!


 이날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가 속한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나름 크로아티아 리그 1위인 디나모 자그레브와의 경기였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이미 승점 1위로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 지은 상태고 디나모 자그레브는 승점 0점이라 솔직히 영양가는 별로 없는 경기였다. 하지만 막상 경기장에 들어가보니 웅장한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되어 버렸다.

 우리가 예매한 자리는 중앙 라인 관중석 맨 위. 말 그대로 깎아지는 듯한 경사의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하는 맨 꼭대기 자리다. 그래도 이런 자리가 무려 30유로(4만5천원)이나 한다. 가난한 교환학생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욕심을 부려 좋은 자리에 앉기는 다소 무리가... 하지만 막상 자리에 앉아보니 생각보다 선수들도 잘 보이고 꽤 마음에 들었다.



 경기 시작 전 선수 소개. 앞서 말했듯이 그리 의미있는 경기가 아니기에 스타 플레이어들은 출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겐 별 의미 없다. 어차피 누가 누군지 잘 알지도 못하는데 뭐. 그냥 한 명씩 소개될 때 마다 같이 환호하며 그 분위기를 즐겼다. 이미 토너먼트 탈락이 결정된 디나모 자그레브지만 크로아티아에서 온 원정 응원단이 한쪽 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원래는 맥주도 마시고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를 볼 생각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후반전이 모두 끝날 때 까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선발중에서 내가 아는 선수는 외질, 샤비, 이과인...정도?


 이날 경기의 라인업과 개인 기록이다. 예상은 했었지만 레알 마드리드가 디나모 자그레브를 무려 6:2라는 큰 점수차로 이겼다. 한 경기에 8골이나 들어갔으니 도통 화장실 갈 틈이 없었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2분만에 벤제마의 골로 레알 마드리드가 발동을 걸기 시작하더니만 10분도 채 안되어 3:0이 되고 말았다. 토너먼트 진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기라 지루할까봐 다소 걱정을 했었는데 정신없이 골이 터져주는 덕분에 의외로 흥미진진했다. 전반전을 마칠 때 까지의 스코어는 4:0. 무려 네 골이나 먹힌 디나모 자그레브의 골기퍼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이날 찍은 동영상중에 하이라이트! 후반전 21분, 카랭 벤제마가 레알 마드리드의 6번째 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이다. 하도 골이 많이 터지길래 아예 동영상을 키고 있었는데 그 사이 한 골이 들어가는 덕분에 운좋게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골이 들어가자마자 다들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고 환호하는 통에 카메라가 켜진줄도 모르고 덩달아 신나서 방방 뛰었다.

 6:0으로 싱겁게 끝날 줄 알았던 경기는, 후반 마지막에 디나모가 뒷심을 발휘하며 무려 두 골이나 넣는 덕분에 6:2로 끝이 났다.




성호형은 무려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오셨다! 오오오


 경기가 그렇게 끝나고, 8만 석이나 되는 경기장을 가득 채웠던 관중들이 빠져나가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잠실 야구장만 해도 경기가 끝나고 나갈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한참이나 걸리던 기억이 나는데... 어찌나 경기장을 잘 지어놨는지 정말 5분도 안 걸려서 사람들이 슝~하고 빠져버리더라. 축구 강국답게 선수들 뿐 아니라 경기장 마저 잘 지어져 있다는게 내심 부러울 따름이었다.

경기 시작 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파노라마


 경기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며 나의 기분은... 마치 큰 숙제를 하나 끝낸 기분? 비록 해외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해도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홈 구장인 베르나베우에서 관람한건 오래도록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었던것 같다. 또 그런 생각도 했다. 내가 좀 더 해외 축구에 관심이 많은 팬이었다면 훨씬 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베르나베우에 다녀왔을텐데. 왠지 진짜 여기 너무 와보고 싶어하는 친구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랄까. 멀리 한국에서 오늘도 밤을 새며 축구를 보고 있을 친구들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어쨌거나 생각보다 경기는 훨씬 더 재미있었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더 멋졌다. 우리집에 같이 사는 Alex는 조만간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렌티코 마드리드의 경기를 '아주 좋은 자리'에서 볼거라며 자랑을 하더라. 표는 독일에서 부모님이 생일 선물로 보내줬다고 하는데... 축구에 관심이 없던 나 조차 한번 경기를 보고나니 괜시리 부러운 마음이 들더라. 이게 바로 스페인 축구의 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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