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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차에서의 둘째날 아침은 조금 특별했다. 오늘 아침도 문을 열고 나가면 어김없이 '짜이?' 하고 외치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똑똑똑... 나가기도 전에 먼저 문을 먼저 두드리는 주인장. 무슨 일일까? 내가 짜이를 좋아하는걸 알고 일부러 가져다 준걸까?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짜이 한잔을 들고 환하게 웃는 주인장이 떡하니 서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했다. 누굴까? 이역만리 인도땅 한가운데서 낯선 여행자를 찾아온 손님이라니... 그 손님의 이름은 '가네쉬'. 인도에서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을 가진 눈이 크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반갑게 한국어로 인사를 먼저 건네는 가네쉬. 인상은 참 좋아보이지만 인도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지라 나도 모르게 경계의 눈빛으로 그 인사를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게스트하우스 중정에 앉아 30여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나에게 정중히 부탁을 하러 이른 아침부터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온 것이었다. 자기 마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오르차의 평범한 일상 풍경.


 그렇게 가네쉬와의 대화를 끝내고 아직 잠들어있는 누나를 깨웠다. 어제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듯 졸린 눈으로 막 잠에서 깬 누나는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일단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고 가네쉬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도움을 청하는건지, 아니면 뭔가 또 허술한 속임수를 써서 관광객을 등처먹으려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이랑도 잘 아는 사이라고 했지만 주인장이라고 항상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 의심이 많은 나에 비해 누나는 오히려 흔쾌히 수락하고 싶어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거리로 나와 어제 김치라면을 먹었던 '스카이 뷰 레스토랑'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침식사를 하며 가네쉬의 제안을 곰곰히 생각해봤다.


 어제 한국음식을 시켜서 된통 당했으니 오늘은 현지 음식을 좀 먹어기로 하고 에그커리와 쵸우면(사실 이건 인도요리가 아니지만)을 시켰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하며 누나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가네쉬의 사연은 오르차의 빈민촌인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을 위해 영어 선생님이 되어달라는 것. 사실 가네쉬 역시 그리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은 아주 기초적인 알파벳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게 전부고, 그것마저 제대로 공부할 학교가 없어서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그동안 영어 수업을 조금씩 받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 어제 나와 누나가 오르차에 왔고, 한국인이 많지 않은 터라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부터 와서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일단은 속는셈 치고 가네쉬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은 간즈 빌리지라는 마을에 가보면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마침 또 누나는 교대를 졸업하고 인도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할 예정이라 어쩐지 우리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오르차 말고, 진짜 오르차를 만나러 간즈빌리지로 향했다.


 사실 오르차에서 할 일은 어제 하루만으로 다 끝났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걸어서도 주변 유적지를 충분히 다 돌아볼 수 있었고, 남은 시간동안은 여유롭게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사진찍으며 보낼 계획이었다. 결국 오르차에 더 머무를거라면 보람있는 일을 해보는것도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교육을 전공하는 누나의 의지와, 인도의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싶은 건축학도인 내 생각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자 가네쉬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우리는 간즈 빌리지로 향했다. 인도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고, 지금도 다시 인도를 찾고싶게 만드는 간즈빌리지에서의 아련한 추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네쉬...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보고싶다.


 가네쉬는 참 정이 많은 친구다. 그당시 나이가 24살(한국 나이인지 만 나이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이었으니깐 지금은 26살이 되어 있을 가네쉬. 나보다 겨우 두 살 더 많은 형이었지만 깊게 주름이 패인 눈가와 거친 손은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고 있는지를 방증하고 있었다. 간즈 빌리지로 향하는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르차에서도 1km 넘게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간즈 빌리지는 그야말로 극빈층 인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이다. 인도는 아직도 카스트제도의 영향때문인지 계층에따라 계급을 나누고 하층민을 천대시하는 풍습이 남아 있는데 간즈 빌리지는 오르차 사람들에게도 무시받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고 했다. 대부분이 노인들인 간즈 빌리지에는 열댓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네쉬가 제일 큰형 노릇을 하고 있다. 자신은 한국 관광객들을 통해 조금씩 배워 어느정도 영어를 말할 수 있지만 아직 초등학생 나이에 불과한 아이들은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우리를 그토록 기다리고, 또 간절히 부탁해온건 큰 형으로서 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책임감에서였을까.


 


간즈 빌리지로 가는 길. 시내와 또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오르차 시내에서 간즈빌리지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이다. 성큼성큼 잘도 걷는 가네쉬를 따라 열심히 간즈빌리지를 향해 걸었다. 뜨거운 인도의 태양 아래서도 가네쉬의 이야기는 멈출줄을 모른다. 그동안 한국인 여행자들이 오르차에 올 때마다 이런식으로 잠깐씩 부탁을 해서 겨우겨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요 근래에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거의 없어서 우리가 꽤 오랜만에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간즈 빌리지 아이들의 미래를 두 어깨에 짊어진 가네쉬는 그래서 더욱 우리에게 살갑게 대하는 듯 보였다.

 



마을입구의 '웰컴트리' 아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는 주민들.


 간즈 빌리지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주민들이 달려나와 우리를 환영해준다. 제대로 된 교육시설 하나 없기에 우리를 반겨주는 그들의 눈빛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인도에서 조금은 닫혀있었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우리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네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꾸만 한국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놈의 영어가 뭔지, 한글을 제대로 깨치기도 전부터 주구장창 알파벳을 외워야 하는 요즘 한국 아이들. 왜 배워야 하는지, 왜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학원과 집을 오가며 영어공부에 매달려야 하는지도 모른채 힘들어하는 한국 아이들. 하지만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은 어딘가 달랐다. 배우고 싶어도 학교가 없고 가르칠 선생님이 없어서 영어를 배울 수 없는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기에 가네쉬가 우리를 찾아온거고, 이토록 환영받을 수 있었던게 아닐까.





앞으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게될 간이 학교.


 오늘은 수업을 하기위해 부른게 아니라 친구가 되고싶어 우리를 불렀다고 했다. 간단하게 마을을 둘러보고는 마을 뒷동산에 올라 학교로 쓰이고있는 허름한 건물을 찾아갔다. 오래도록 한국 선생님을 구할 수 없어서 굳게 닫혀있는 문을 가네쉬가 신이 나서 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괜히 우리도 기분이 들떴다. 사실 가네쉬의 제안을 수락하고 간즈 빌리지로 걸어올때 까지만 해도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우리가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혹시나 폐만 끼치고 가는건 아닐까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가네쉬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면 할 수록 그런 부담은 씻은듯이 없어졌다. 어쩌면 가네쉬는 친구가 필요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건 아니었을까. 우리를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마냥 즐거워하는 가네쉬를 보며 인도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품었던 의심의 벽을 그렇게 서서히 허물어가고 있었다.







간즈빌리에서 바라보는 인도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가네쉬는 말 끝마다 연신 '고맙습니다'를 연발했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내가 고마운점도 있다. 인도 그 어느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환상적인 풍경을 간즈 빌리지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가이드북만 보고 지도만 들고 다녔더라면 영영 모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 오르차의 풍경. 그걸 만난것만으로도 간즈 빌리지에서의 기억은 너무 아름다웠다...


눈으로 본 감동을 그림으로 옮기고 싶었지만...쉽지가 않다.


 언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그렇게 가네쉬워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가네쉬는 인도를 여행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인사다. 오르차를 들렀던 여행자라면 한번쯤은 가네쉬를 만났을테고, 나처럼 부탁을 받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사람들도 꽤 있는듯 했다.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가네쉬의 사진과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전 찾아본 사진속의 아이들은 그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


 언덕에 앉아 잠깐 크로키북을 펴고 그림을 그렸다. 하늘을 뒤덮은 전깃줄과 전신주, 옹기종기 모여있는 삐딱한 집들, 그리고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있는 인도의 여느 풍경과는 달리, 오르차 간즈 빌리지의 풍경은 펜 하나로 표현하기 너무 어려웠다. 아니, 내 그림 실력으로는 도저히 그때의 감동, 광활한 대자연의 풍경을 담아낼 수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다. 잠깐 끄적이다가 말고 다시 가네쉬와 이야기를 나눴다.







간즈 빌리지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야기를 한창 나누고 있는데 저 멀리서 아이들이 여럿 뛰어온다. 앞으로 우리에게 영어를 배울 '학생'이 되어줄 간즈 빌리지의 꼬마들이다. 천진난만한 모습, 커다랗고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이지만 빈민촌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한번 받지 못한 그들을 보는 순간 짧은 시간이지만 최선을 다해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 처음 만나는 자리지만 아이들과는 금새 친구가 되어 서로 장난도 치고 그랬다. 어느새 해는 슬슬 저물어가고 있었다.

 






정이 많은 한국 사람들 덕분에 간즈 빌리지에는 희망이 있었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을 지금까지 가르친건 정 많은 한국 여행자들과 가네쉬의 열정이었다. 언덕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네쉬에게 물어봤다. 왜 한국 사람들에게만 부탁을 하느냐고. 가네쉬의 대답은 간결했다. 마음 착하고 정이 많은 한국사람들 말고는 시간을 내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줄 여행자가 없었다고. 서양 여행자들에게도 몇번 부탁을 해 보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여행 일정을 포기할 수 없어서 번번히 허탕을 쳤다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가네쉬의 목소리에는 한국에 대한 깊은 동경과 한국사람들에대한 애정이 녹아들어있었다. 왠지 모르게 한국사람인게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르차로 돌아가는 길,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그렇게 간즈 빌리지와의 첫만남을 마치고 다시 오르차로 돌아가는 길, 괜찮다고 몇번을 사양했지만 이내 가네쉬가 내 가방을 자기 어깨에 메고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루만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였을까. 돌아오는 길에 우리 세사람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저마다 머리속에는 많은 생각을 하고있지 않았을까. 똑같은 20대, 비슷한 나이의 세 사람이지만 같은 하늘아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그리고 간즈 빌리지의 아이들. 인도 여행을 하며 참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가네쉬가 더욱 특별하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는 그 덕분에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날 우리가 만난건 인도의 빈민촌 간즈 빌리지가 아니라 진짜 '인도'의 모습이었다. 평범하게 여행하고 돌아갔으면 영원히 몰랐을 가네쉬와의 인연, 간즈 빌리지의 이야기. 그걸 만난 것만으로도 오르차에서 하루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시작될 수업을 생각하며 오르차에서의 둘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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