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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처음 스트라이다를 끌고 제주를 오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에만 해도, 이 조그만 자전거를 타고 오름에 가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일주도로에서는 조금만 오르막이 나와도 이내 한숨부터 쉬던 우리가 별안간 오름에 가보겠노라 결심을 하게 된 건, 다 '생태숙소 퐁낭'의 마당비님 덕분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그 분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를 제주의 진짜 아름다움을 소개시켜 주셨기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아무 계획 없이 훌쩍 떠나는, 그야말로 방랑을 즐기는 타입. 또 하나는 철저히 조사하고 공부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 까지도 여행의 시작으로 여기는 타입. 나는 그 중 두 번째에 가까운 사람이다.

미리 철저하게 계획을 해도, 예측할 수 없는게 바로 여행이다.


 떠나기 전에 미리 계획하고 공부하는게 꽤 머리아픈 일이긴 해도, 그것 마저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즐기는 편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방랑을 즐기는 사람들 눈에는 나같이 여행하는 사람들이 미련하고 고지식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오히려 철저한 계획과 조사가 있어야만 그걸 바탕으로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일정이 또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오름에 갈 수 있게 된것도 미리 생태숙소 퐁낭의 정보와 위치를 알아왔고, 그렇게 마당비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우도와 성산 일출봉을 포기해야 하는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다시 제주를 찾을 여지를 남긴거라고 생각하고 쿨하게 핸들을 돌렸다.

오름 한번 오르겠다고 구불구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일정이 변경되면서 루트가 많이 꼬여버렸다. 일단 온평리를 출발해 섭지코지를 갔다가 다시 삼달리까지 뒤로 돌아와 두모악에 먼저 들리기로 했다. 그 곳에서 한낮의 태양을 피해 잠시 땀을 식히고, 용눈이 오름과 다랑쉬 오름에 올랐다가 한라산 중턱을 가로질러 월정리로 빠지는 길을 택했다. 출발하기에 앞서 지도에 미리 펜으로 길을 그려보는데 굽이굽이 돌아가는 모양새가 왠지 불길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것 보다 더 두려운건, 바로 오르막이다. 지도는 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나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온평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 달리다보니 금새 섭지코지에 도착했다. 아직 오전이지만 벌써부터 도로 위가 조금씩 뜨거워지는게 느껴진다. 정오가 되기 전에는 두모악에 도착 해야 해를 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섭지코지에선 잠깐만 머무르려 했었는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생각보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섭지코지에서 부터는 다시 뒤로 돌아가야 한다


 아이스크림으로 잠시 더위를 식히고, 다시 짐을 챙겼다. 섭지코지부터 두모악까지는 왔던 길을 다시 10km정도 되돌아 가야만 한다. 어제 헛걸음 했던게 아쉬워서라도 오늘은 꼭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하는게 그렇게 억울하지만은 않았다. 다행히 삼달리까지는 오르막이 거의 없는 일주도로가 계속된다.
 

여행자들을 언제나 편하게 맞아주는 그 곳, 두모악

 
 드디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도착했다. 1132번 해안도로에서 1136번 중산간 도로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올레길 코스로도 잘 알려진 곳이라 많은 여행자들이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곳이다. 이미 시계바늘은 정오를 넘어섰고, 중산간 도로로 진입하기 전에 이곳에서 두어시간 정도 쉬었다 가기로 했다. 날이 어찌나 뜨겁던지, 가방안에 넣어둔 파스 스프레이통이 터질까봐 그늘로 자전거를 옮겨놓아야 할 정도였다.

이 빙수 한그릇을 먹고서 무려 8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한켠에는 무인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솔솔 나오는 곳에서 맛있는 빙수도 먹고 짐도 새로이 정리하며 오름에 갈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준비가 끝났는데, 어째 하늘은 준비가 덜 된것 같다. 3시 정도가 되면 열기가 한 풀 꺾일줄로만 생각했는데 여전히 바깥 공기는 후끈하기만 하다. 더 미적거리다가는 오늘내로 숙소에 도착 못할것 같아서 스카프 질끈 동여 묶고 자신있게 다시 출발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진 속 빙수가 오늘의 마지막 만찬이 될 줄은 몰랐다. 나올때 물통에 시원한 물을 채우는걸 깜빡 하고 그냥 나왔는데, 그게 또 큰 실수였다.

1136번 도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아직은 어색하다


 제주도를 순환하는 도로는 크게 세 개가 있다. 가장 고도가 낮고 자전거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1132번 일주도로, 그 보다 고도가 조금 높은 1136번 중산간 도로, 그리고 가장 고도가 높아 자전거로는 잘 가지 않는 산간도로. 대부분의 자전거 여행자들은 1132번 도로만을 이용하는게 보통인데, 우리 역시 처음 계획은 그랬었다. 그래서였을까. 두모악을 출발해 1136번 중산간 도로에 진입하는데 괜히 혼자서 뿌듯했다. 이 도로를 따라서 제주시 구좌읍으로 넘어가는 시 경계까지 가면 용눈이 오름과 다랑쉬 오름이 있다고 한다. 확실히 일주 도로보다는 경사가 있어서 그런지 페달을 밟을 때 마다 허벅지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다.

 

자신있던 모습도 잠시, 무시무시한 오르막은 나를 안장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 30분쯤 갔을까. 바다와 나란히 달리던 1136번 중산간 도로는, 별안간 방향을 틀어서 한라산을 바라보고 계속 이어진다. 이때부터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뜨거워질대로 뜨거워진 도로위에는 나무 그늘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가기 시작하는데, 도로에는 지나가는 자전거는 커녕 차도 드물다. 이따금씩 '허' 번호판 달린 렌트카가 쌩 하고 약올리듯 스쳐 지나가는 걸 빼고는, 정말 도로 위에 '개미 새끼' 한마리 없다.



힘들땐 그대에게 양갱을!


 결국 그늘을 찾아 들어가 잠시 쉬기로 했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덕분에 자리에 앉아도 서로 말 한마디가 없다. 이럴때 먹으려고 미리 챙겨온 양갱을 꺼내서 한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다! 달달한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왠지 다시 힘이 나는것 같기도 하다. 그놈의 오름이 뭐길래... 이제는 오기조차 생기는것만 같다.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오름은 꼭 보리라!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풍경


 끝이 보이질 않는 오르막의 연속. 그렇게 묵묵히 자전거를 끌며, 또 타며 한 발짝 씩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오름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봤는데, 어느새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확실히 바다에서 멀어졌다는게 느껴진다.


드디어 구좌읍에 들어섰다...온몸으로 피로를 표현하는 중!


 그렇게 우리는 제주시 경계를 넘어 오름 입구에 도착했다. 멀리 저 표지판이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표지판과 함께 길고 지루한 오르막도 끝이 났다.
 

다랑쉬로를 사이에 두고 다랑쉬오름과 용눈이오름을 만날 수 있다


 '다랑쉬로'라는 작은 길을 사이로 용눈이 오름과 다랑쉬 오름이 마주보고 있다. 사실 '다랑쉬로'는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아니라 그냥 시멘트로 된 작은 길이다. 마당비님의 추천이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칠뻔 했지만, 오름에 올랐다가 이 길을 통해서 돌아가기로 했다. 오름 사이를 통과하는 길이라 그렇게 경치가 좋단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다랑쉬 오름의 비밀 산책로인 셈.



걸어서 용눈이 오름까지 가는 길


 '다랑쉬로'가 있는 삼거리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용눈이 오름까지 걸어 가기로 했다. 용눈이 오름에 오르는 탐방로는 두 군데서 출발하는데, 마당비님은 그 중 북쪽 탐방로를 추천하셨다. 스케일바가 없는 지도라 걸어서 가도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다랑쉬로 입구에서 꽤 거리가 멀다. 한참을 걸어서야 겨우 용눈이 오름 탐방로에 도착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깨끗한 오름의 풍경들


 날씨 한번 끝내준다. 자동차 타고 쉽게 왔으면 별 감흥 없었겠지만, 자전거를 끌고 힘들게 온 만큼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저 언덕 위에서는 또 어떤 풍경이 보일까 상상하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오름을 오르기 시작해본다. 용눈이 오름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30분 정도면 탐방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고 했다.




오름에 오르는 길, 유난히 사람이 더 작게만 느껴진다


 반대편으로 보이는 다랑쉬오름은 용눈이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시간이 허락하면 다랑쉬 오름에도 올라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조금씩 정상에 가까워 질 수록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새삼스럽지만, 돌.바람.여자가 많아 삼다도라는 말이 여행하는 내내 귓가에 맴돈다(여자는 '사람'으로 대신해서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인연을 만들었으니).


드디어 오름 정상에 올랐다...감격의 순간!


 드디어 정상이다. 오름을 찾아 오르막을 올랐던 여정의 달콤한 종착지다. 아무도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정상에 오르니 올레꾼들이 여럿 보인다. 우리도 옆에 같이 앉아서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바라보고 앉았다. 귀가 아플정도로 쉴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제주의 풍경을 빚어내는 원동력이다. 한 방향으로 모조리 누워버린 풀들이며 나무들은 아무것도 없는 밋밋한 언덕에 마치 그림을 그리듯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비록 성산 일출봉도 보지 못했고, 우도도 지나쳐야 했지만 오늘 오름을 찾아 이곳까지 온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오름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진짜 제주를 보지 못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전거를 탈 때는 그토록 얄밉고 피하고 싶었던 태양이지만,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초원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정상에 올라 미리 챙겨온 감귤을 까서 입에 넣는데, 그야말로 꿀맛이다.



하지만 오름에서 내려와 돌아가는 길은 험난한 여정의 반복이었다


 오름에서 내려와 월정리로 가는 길에는 소나기가 내렸다. 다시 바다쪽으로 나가는 길이라 내리막이 계속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좀처럼 시원스런 내리막이 나올 생각을 않는다. 비자림과 만장굴을 지나 계속 달렸다. 가져온 물도 동이 나버렸고 배도 많이 고픈데 마을은 커녕 슈퍼 하나 보이질 않는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아까 오르막을 오르며 무리했는지 오른쪽 무릎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왼발 하나로만 허우적거리며 젖먹던 힘까지 다 해서 페달을 밟았다.

이거야 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


 만장굴 근처쯤 왔을때, 드디어 멀리 슈퍼가 하나 나타났다. 온몸의 빗물을 닦아 내는 것도 잊은 채 냉장고를 열고 시원한 음료수부터 들이켰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게 좀 들어가니 아이러니하게도 몸이 좀 따듯해 지는것 같았다. 소나기를 맞으며 몸에서 김이 나도록 여기까지 달려왔으니 그럴만도 했다.

다시 만난 1132번 일주도로, 반갑다!


 그렇게 길고 긴 산속 라이딩을 마치고, 6시가 다 되어서야 다시 1132번 일주도로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비를 퍼부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맑아져 있었다. 스트라이다로 오름에 다녀오겠다던 무모한 계획을 무사히 마친 서로에게 수고했다며 인사를 건넸다. 몇 일간 자전거를 같이 타다보니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호흡이 척척 맞는다. 하지만 내일이면 벌써 서울로 떠나야 할 시간. 지나간 시간 보다 남은 시간이 더 적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숙소까지 가는 내내 페달을 밟는 속도가 조금은 느려진것만 같았다.(계속)




오늘의 코스 리포트
(생태숙소 퐁낭-섭지코지-두모악-다랑쉬오름-비자림-만장굴-소낭게스트하우스)

혹시라도 이 길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고 갈 생각이라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는게 좋다. 1136번 중산간 도로를 타고 부터는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미니벨로는 조금 버거울 수도 있다. 그보다도 일단 두모악을 출발해서 만장굴에 이를 때 까지는 슈퍼하나 찾을 수가 없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만큼 미리 먹을 음식이나 물을 준비해서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의 라이딩 리포트
2010년 8월 6일 / 4일차

주행거리 : 54.24 km
주행시간 : 3시간 22분
최고속력 : 38.9 km/h
평균속력 : 16.1 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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