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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이틀 만에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왔다. 짐칸에 고무줄로 칭칭 묶어놓고 다닐때는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쓸데없는 짐이 꽤 많은것 같다. 벌써부터 짊어진 가방 때문에 어깨가 살살 아파온다.
 마라도에는 오로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때문에 자동차도, 자전거도 모슬포항에 잠시 세워두고 배에 올라야 한다. 매 시간마다 마라도로 향하는 200명 정원의 쾌속선에는 발디딜틈 없이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다들 무슨 이유에서 마라도를 찾는걸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유난히 배 안에는 임산부가 많이 보인다. 마라도의 정기가 태교에 도움이라도 된다는 소문이 있는걸까... 어쨌거나 오랜만에 배를 타서 그런지 한껏 기분이 들떴다. 서울 촌놈이라 그런지 배만 타면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오곤 한다.



날씨가 너무 좋아! 이런 날이면 배멀미를 해도 마냥 신이 날것만 같다


 요란하게 뱃고동을 울리며 모슬포항을 떠났다. 점점 멀어지는 제주의 해안은 송악산과 산방산의 불쑥 솟은 산세가 수평선과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렇게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는 날이면 아무래도 구름낀 희뿌연 하늘보다는 새파란 바다색 하늘이 더 반갑기 마련인데, 오늘 하늘이 바로 그랬다. 
 말 그대로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투명한 그런 느낌.

"마라도행 배에 탑승하신걸 환영합니다....근데 왜 타셨어요? 볼것도 없는데" -DJ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마라도행 정기 유람선에는 비밀이 하나 숨어있다. 그건 다름 아닌 1층 객실에서 마이크를 잡고있는 바로 저 분! 노래방 화면 같이 커다란 티비 앞에 선 그는, 다름아닌 유람선 DJ다. 조금은 정색하는 듯한 말투와 빵빵 터지는 유머로, 마라도까지 가는 동안 잠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80년대에서 막 튀어나온듯한 DJ의 모습에,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신이 나신 모양이다. 조금 전 까지도 의자를 부여잡고 배멀미를 하시던 할머니 한분은 어느새 언제 그랬냐는듯 아이처럼 웃으며 즐거워하고 계셨다.


마라도를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


 한참을 그렇게 DJ 아저씨의 농담을 듣고 있다가 갑판 위로 다시 올라왔다. 어느새 배는 가파도를 지나 마라도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마라도는 작은 섬이지만 동서남북 네 개의 항구가 있다고 한다. 정기 유람선은 그중 가장 큰 항구인 북쪽 항구에 정박한다.
 날씨가 너무 맑아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떠나온 모슬포항과 산방산, 가파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나마 한 두 조각 있던 구름들도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그야말로 '땡볕'에서 꼬박 두 시간을 보내게 생겼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마라도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기대감과 셀렘이 묻어나온다.

우리를 태워준 배는 다시 모슬포항으로 떠나고...


항구 근처에 있는 공중 화장실!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의 모습... 학생은 단 세명!


어서오세요! 하고 맞아주는 마라도 자장면집의 풍경


 마라도에는 100명이 채 안되는 주민들이 살고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장면 집은 무려 다섯개! 이미 여러번 방송에 나오며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이 모든게 과거 이창명이 하던 '스피드 011' 광고 카피 하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마라도까지 가서 무슨 자장면을 먹어야 하냐며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자칫 밋밋할 뻔 했던 마라도에서 태어난 '자장면'이라는 또 다른 문화는 어느새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꼭 거쳐가야할 하나의 '의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그 이름도 유명한 마라도 자장면!


 나의 여행 철학은 언제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미 점심때를 훌쩍 넘긴 시간이라 자장면이 아니라 그 무엇도 먹을 수 있을것만 같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여러 가게 중에서 특별히 '무한도전'에 나왔던 집을 선택했다. 평소 무한도전을 잘 안보는 편이지만, Yes or No 편에서 정형돈이 거의 눈물을 흘리며 마라도 자장면을 먹던 그 장면을 잊을수가 없었다.
 가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이곳에서 먹어본 마라도 자장면의 특징은... 담백하다는것! 가격도 5000원이나 되기 때문에 가격대비 딱히 맛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기름이나 조미료가 많이 안들어간 듯한 그런 맛이었다.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음식같다고 해야할까. 저 위에 올려진 해초같은건 '톳'이다. 마라도 자장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인데 사실 비벼서 먹다보면 별다른 느낌은 없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그냥 이 모든게 너무 재미있는 문화다. 이창명의 '자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서 자장면을 시켜 먹고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게다가 맛도 나쁘지 않았으니 더더욱 좋다. 전날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장면이 맛 없었다며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건 음식을 먹는거라기 보다는 '문화'를 먹는거라고 생각하면 적당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해주고 싶다.



마라도에는 차도가 없다. 현무암을 깔아 만든 오솔길만 한바퀴 빙 돌아간다


 마라도가 작은 섬이긴 해도, 찬찬히 풍경을 음미하며 걷다보면 30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2시 배로 들어와 4시 배로 나갈 예정이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장면을 먹고 쉬다보니 시간이 금새 흘러버렸다. 조금 종종걸음으로 섬을 크게 한바퀴 둘러보고 돌아가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자동차나 자전거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전기 카트를 빌려서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시간에 2만원 정도 하는 전기 카트는, 주로 가족단위 여행객들이나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찾는다. 하지만 마라도까지 와서 저렇게 빠른 속도로 풍경을 스쳐 지나가 버리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도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 하나가 못내 아쉬운데, 저렇게 빨리 다니면 뭐 기억에 남는거나 있을까...




제주 풍경의 팔할은 '바람'이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무 작은 섬이라 볼게 없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었다. 그 말만 믿고 마라도를 건너 뛰었더라면, 나중에 인터넷에서 사진을 보면서 두고두고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특별히 볼거리나 놀거리가 있는 '관광지'는 아니지만 30분 정도면 섬을 한바퀴 돌며 동서남북의 풍경을 모두 즐길 수 있다는건 작은 섬만이 가진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 그리고 제주의 자연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그런 것이다.

대.한.민.국.최.남.단.


 반 바퀴를 돌아, 항구 반대편 남쪽 끝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최남단...
 작년에 들렀던 해남 땅끝마을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도 괜시리 기분이 묘해지는걸 느꼈었는데 마라도에 와서 끝없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이 자리에 서니 더욱 그랬다. 

 외국에 나가 배낭여행을 하다보면 한국에 대해서 물어오는 외국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가 그들이 사는 나라, 그들의 문화가 궁금해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 것 처럼, 그들도 내가 사는 나라, 그곳의 문화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외국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는 나의 나라, 나의 조국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어쩌면, 어떤 힘에 이끌려 오듯 오늘 마라도에 오게 된 것도 내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현무암 덩어리 하나에 괜히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한다... 에잇, 어색해.





풀 색깔, 바다 색깔... 하나하나가 다 예뻐보였다.


 다시 항구로 돌아가는 길, 잠깐 여유를 부린 탓에 시간이 촉박해졌다.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자꾸만 그림같은 풍경이 내 발목을 잡는다.

 어떻게 바다, 하늘, 구름, 풀, 이렇게 네가지만 가지고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무리 인간이 뛰어난 피조물이라고 할지라도 자연은 이토록 간단한 방법으로 '미'를 창조하고 있다.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주칠때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만 같다. 그저 바라보고, 사진에 담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시간.. 다음에 다시 만날...수 있을까?


 다시 배를 타고 마라도를 떠나오는 길. 그늘 한점 없는 섬에서 두시간 내내 돌아다녀서 그런지 피곤이 몰려온다. 다행히 객실에는 에어컨이 잘 나와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다시 배를 내리면 또 자전거를 타야 하니 미리미리 쉬어두는게 좋겠다.

 너무 짧은 만남이라 모든게 꿈만 같다. 언젠간 또 다시 찾아올 수 있겠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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