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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천사들이 에덴동산에서 사진 촬영 작업을 하였다면, 그들이 찍은 야생 생물 사진은 오늘날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들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 퀸켈은 자신의 저서에 탄자니아의 응고롱고로 분화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칼데라 분화구이자 8대 불가사의 중 한 곳인 응고롱고로 분화구. 마사이어로 '큰 구멍'이라는 뜻의 이 거대한 분화구에는 사파리의 빅 5라 불리는 사자, 코끼리, 표범, 코뿔소, 버팔로를 비롯하여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거대한 두 팔을 뻗어 대지를 감싸 안는듯한 모습의 응고롱고로,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짐을 챙겨 텐트를 나왔다.

세렝게티의 아침이 저 멀리 밝아오기 시작한다


 간밤에 이슬이 촉촉하게 내려앉은 텐트를 걷고 나오자, 희미한 안개 너머 산 아래로 마냐라 호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른 새벽이지만 부지런한 여행자들은 모포를 두르고 의자에 앉아 가벼운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은 멀게, 그리고 작게만 보이는 바로 저 곳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지프를 타고 달리며 동물들을 가까이에서 보았다는게 아직도 믿겨지질 않는다. 그저 꿈 속의 한 장면을 거닐 듯,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듯 그렇게 나도 잠깐 멈춰서 기지개를 활짝 피며 하루를 시작해본다.

캠프사이트에서 맞이하는 소박하지만 맛있는 아침 식사


 이곳 캠프사이트에서 응고롱고로 분화구 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침 일찍부터 먼길 떠날 생각을 하니 괜히 배가 더 고파지는것만 같다. 막 따온 신선한 과일과 간단한 토스트, 차와 커피로 가볍게 아침식사를 끝내고 지프에 올랐다. 평범한 아침식사지만 밖에서 먹으니 왜 그렇게 맛있기만 한지. 혹시 탈이 나기라도 할까봐 더 먹고싶어도 꾹 참기로 했다.
 마냐라 호수와는 정 반대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끝없는 평원위로 길게 뻗은 도로를 타고 시원스레 지프가 달리기 시작한다. 이따금씩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화려한 원색의 옷을 몸에 휘감은 마사이족들도 눈에 띈다. 적게는 두 세마리부터 많게는 백여마리까지 소를 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응고롱고로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한 시간여를 달린 끝에 드디어 응고롱고로 국립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세렝게티 게임 드라이브 최고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많은 동물을 볼 수 있는 곳 답게 입구부터 꽤 잘 꾸며져 있었다. 아홉시도 안된 이른 시간이지만 이미 입구에는 수많은 사파리 지프들이 차례로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표소 옆 자그마한 전시실에서는 응고롱고로에 관련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이 큰 분화구가 형성되었는지 보여주는 모형부터, 각종 엽서와 사파리 모자같은 기념품까지. 규모는 작지만 볼거리는 제법 쏠쏠하다. 오전이지만 벌써부터 햇빛이 꽤나 강하다. 기념품 가게에서 5000실링짜리 사파리 햇을 하나 골라잡았다.


뷰 포인트에 올라서면 응고롱고로 분화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 고스란히 묻어있는 지프는 꽤 덜컹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곧잘 언덕을 따라 오른다. 그렇게 얼마나 더 올랐을까. 우거진 나무사이로 별안간 푸른 하늘과 맞딱드리며 시야가 환해진다. 칼데라 분화구의 주변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산등성이 중 한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무려 해발 3000미터. 멀리 구름아래로 보이는 드넓은 응고롱고로 초원의 모습이 마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만든다.
 뷰 포인트 바로 옆으로 조그만 비석이 하나 세워져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치려 하는데, 비석 한쪽에 깨알같이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코뿔소에 습격으로, 혹은 코끼리에 밟혀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 이곳 응고롱고로를 탐험하다가 떠난 사람들의 이름이다. 지구상의 마지막 지상낙원, 야생동물들의 에덴동산을 알리고 가꾸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그렇게 한 명, 또 한 명 초원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새겨져 있었다. 



마치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끝없는 초원이 푸른 하늘아래 펼쳐진다


 다시 지프는 방향을 틀어 이번엔 가파른 내리막을 내달리기 시작한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조금씩 내려가면서 구름아래 에덴동산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진다.
 아루샤 시에서 서쪽으로 120㎞ 떨어진 이곳 응고롱고로 분화구는 둘레만 326km,  남북길이 16km, 동서길이19km에 달하며, 칼데라 분지의 크기는 백두산 천지의 30배나 된다고 한다. 드넓은 초원을 둘러싼 가파른 산세 덕분에 대부분의 동물들은 이동없이 이곳 분화구 안에서 일생을 보내게 된다. 물론 사자나 표범같이 날렵한 맹수들은 산을 넘어 멀리까지 먹이를 찾아 가는 일도 있다고 하는데, 전에는 코끼리 한마리가 분화구를 빠져나와 한창 이슈가 되었던 적도 있단다.





분화구로 내려가는 길, 마사이족들이 자주 눈에 띈다


 분화구의 규모가 워낙 큰 까닭에 내려가는데만 해도 시간이 꽤나 걸린다. 지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마사이족들이 사는 마을도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사이족은 본래 순수한 원시 부족이었지만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상업화 되어버려, 이제는 그들의 마을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50달러나 되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그나마도 정해진 마을만 잠깐 들어가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꽤 거리가 먼 마을이라 아쉽게도 방문은 포기해야만 했다.


왠지 쓸쓸해보이는 그들의 뒷모습


 자신의 문화를 지키고 살아가기 보다는, 문명과의 접촉을 통해 스스로 관광상품으로 전락해버리기를 택한 마사이족.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과거의 용맹은 온데간데 없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이내 돈을 먼저 요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 역시 이곳에서 그들의 삶과 자연의 조화를 방해하는 이방인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눈길이 조심스러워 진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이곳 초원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어제 마냐라 호수에서 본 동물들은 대부분이 기린이나 코끼리 같은 초식 동물들이었다. 울창한 숲 속에서 가끔씩 마주치는 동물들을 보는 재미가 어제의 게임 드라이브였다면, 이곳 응고롱고로 분화구에서는 넓은 초원을 달리며 사자나 표범같은 맹수를 찾는 또 다른 게임 드라이브가 펼쳐진다. 사자나 표범을 정말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겠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분화구에서 나가지 않을테니 걱정말라며 드라이버는 호언장담을 한다. 운이 좋으면 먹이를 사냥하는 장면도 눈앞에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오늘은 운이 따라줄지...




평화롭다... 그저 그 말밖에는


 그렇게 한참을 더 내려와 드디어 분화구 바닥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말 그대로 게임 드라이브가 시작된다. 나무 한그루 조차 없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따라 달리며 동물들을 찾아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그림같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어보이는 그들의 표정.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동물들이 그야말로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어제 마냐라 호수에서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차에서 내려서는 안되고, 드라이브 역시 정해진 길을 이탈해서는 안된다. 물리적인 울타리는 없지만 사람들의 약속이 만든 보이지 않는 울타리 속에서 그들은 마치 에덴동산 위의 천사들처럼, 평화롭게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또 만났네! 얼룩말아


 내가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얼룩말들. 어제 만났던 녀석들보다 훨씬 더 건강해보이고 토실토실한 녀석들이 터벅터벅 나에게 걸어온다. 손을 흔들며 안녕 하고 소리쳐보는 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건지 한쪽 귀를 씰룩거리며 슬며시 이쪽을 한번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휙 돌려서 다시 제 갈길을 걸어간다. 연애편지를 받고 콩닥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기분이 한없이 좋아진다. 이 곳 응고롱고로는 정말 평화로움, 그 자체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앞에서...


 갑자기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모든 동물들이 뛰기 시작한다. 조용히 차 위를 내다보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며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리고 도망치던 무리 중 한 녀석이 이내 바닥이 픽 하고 고꾸라진다.
 약자가 있으면 그 위에 또 강자가 있는게 자연의 섭리라는 건 알지만, 순식간에 하이에나에게 잡혀 핏덩이로 변해버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진다. 다들 숨을 죽이고 그저 바라보고만 섰다. 
 날카로운 이빨에 쩍하고 갈라지는 걸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입에서 '으'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데, 후루룩거리는 하이에나의 게걸스러운 소리가 온 하늘를 천둥치듯 울려댄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만찬은 모두 끝났다. 입가가 시뻘개진 하이에나는 그렇게 또 유유히 걸어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린다. 무심한 녀석...




자연속에서의 게임은 '규칙'이 있기에 가능하다

 
 꼭 그런 법칙이 있는건 아니겠지만, 먹이사슬에서 윗쪽에 위치한 동물들은 대부분 지프가 다니는 길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잠깐씩 차를 멈추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드라이버가 멀리 보이는 동물들을 열심히 알려주긴 하지만 맨눈으로는 그냥 조그만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곳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중 코뿔소가 꽤 귀한 편인데, 운 좋게도 우리는 한 쌍의 코뿔소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멀리 있어서 망원경으로 봐도 코에 자그마하게 솟은 뿔이 아니면 코뿔소인지 아닌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에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랑은 조금은 달랐던 응고롱고로의 착한 사자들

 
 코뿔소는 비록 가까이서 볼 수 없었지만, 사자는 꽤 여러번 마주쳤다. 헌데, 동물의 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다들 많이 피곤한 표정으로 졸린 눈을 하고 있었다. 멋지게 초원을 질주하며 사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면 좋으련만 그런건 관심도 없다는 표정으로 입가의 파리를 열심히 쫒고 있을 뿐이다. 꽥 하고 소리라도 질러서 일어나게라도 하고싶은데 그럴수도 없으니 다들 속 타는 마음으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도한 건지 무관심한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점심을 먹기위해 호숫가에 모인 지프들


 초원 한 켠에 있는 자그마한 호숫가 나무그늘에서 간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분화구 안이 어찌나 넓은지 길을 다니면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지프들이 하나둘 이곳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굉장하다. 다들 사자며, 코뿔소며 자기가 만났던 동물들 이야로 웃음꽃을 피우며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여유로운 한때를 보냈다.

타조를 보게 될 줄이야...


 식사를 끝내고 나니 온몸이 나른하다. 끈적할 정도로 선크림을 덧바르고 챙이 넓은 모자도 썼지만 팔은 벌써 벌겋게 익어버렸고 목 뒤로는 땀줄기가 멈출줄 모르고 흘러내린다. 다들 지친 표정이지만 혹시라도 표범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쉽게 자리에 앉지 못하고 계속해서 망원경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려본다.
 표범은 아니지만 생각치도 못했던 귀한 손님을 만났다. 다름아닌 타조. 늘 네발로 걸어다니는 동물들만 보아왔기에 왠지 모르게 이곳에서 무리지어 살고있는 타조들이 괜히 더 반갑다. 긴 목을 늘어뜨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참 귀여운 녀석들.



응고롱고에 가장 많은 동물은 아마도 버팔로들이 아닐까


 특별한 구획이 없는 초원이지만, 워낙 규모가 큰 탓에 이곳에는 구역별로 조금씩 다른 동물들이 살고 있다. 지프로 또 한참을 달려 반대편 언덕 언저리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버팔로가 떼를지어 모여있다. 유선형으로 멋드러지게 휘어있는 뿔을 자랑하는 버팔로들은 외모와는 다르게 굉장히 순하다.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조용히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며 응고롱고로 게임드라이브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안녕, 응고롱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제는 다시 캠프사이트로 돌아가야할 시간이다. 바깥세상과는 단절된듯한 드넓은 분화구 안에서 보낸 행복한 시간들이 그저 아쉽게만 느껴진다. 비탈길을 타고 다시 올라가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응고롱고로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오늘도, 또 내일도 따사로운 햇볕으로 응고롱고로에서의 하루를 시작할 동물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 또 흘러가겠지만, 대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그 풍경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것만 같다.

세렝게티를 바라보며 세렝게티 맥주를 한 잔!


 돌아오는 길, 우리의 드라이버는 내내 신이난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사자도 봤고, 코뿔소도 봤고, 게다가 사냥하는 하이에나까지 봤으니 너희들은 정말 럭키한 투어리스트라고 한껏 비행기를 태운다. 뜨거운 태양아래 하루종일 고개를 내밀고 다닌 탓에 온몸이 쑤시지만 그래도 동물들 생각만하면 다시 웃음이 난다.
 생각보다 캠프사이트로 일찍 돌아온 덕분에 저녁먹기 전까지 조금 여유가 생겼다. 미리 사두었던 세렝게티 맥주 두병을 냉장고에서 꺼내와 마냐라 호수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우스갯소리로, 세렝게티 초원에 앉아 세렝게티 맥주를 먹으면 기분이 끝내주겠다고 말을 했었는데, 바로 지금 내가 세렝게티가 내려다보며 세렝게티 맥주를 마시고 앉았다. 그 맛은? 말로는 설명이 안된다. 그야말로 천국의 맛.
 시원한 목넘김으로 응고롱고로에서의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이제 내일은 사파리의 마지막 날. 타랑기레 국립공원에서는 또 어떤 멋진 풍경을 마주하게 될까 상상하며 시원한 저녁바람을 맞으며여유로운 수다를 즐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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