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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답한 지하철 보다는 시원스런 기차가 더 좋고, 제 갈길로만 가는 기차보다는 어디로든 달릴 수 있는 버스가 그저 좋았다. 서울에서 가장 혼잡하다는 2호선 신도림역. 매일 아침 그곳을 지나며 짜증이 나다가도 이내 터널을 빠져나와 신나게 고가위를 달리기 시작하면 창 밖으로 사람 구경하는 재미에 다시 기운이 나곤 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달리는 이 길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또 어떤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질 지. 한 명, 또 한 명 일일히 눈을 마주쳐가며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멀게만 느껴지던 목적지도 한 달음에 닿곤 한다. 그래서 였을까. 다르에스살람에서 아루샤까지는 버스로 6시간이나 걸린다는 말을 듣고 한숨을 먼저 푹 내쉬는 후배녀석을 앞에 두고 괜히 혼자 또 설레이기 시작했나보다.

조금 불편해도, 밤 배만의 낭만이 있다


 아름다운 능궤 해변에서 만끽했던 여유와 스톤타운 골목마다 가득 베어있던 정취도 모두 뒤로하고, 밤 배를 타고 잔지바르를 떠난다. 잔지바르 섬으로 들어올 때 탔던 고속페리보다는 조금 더 싸고, 조금은 더 느리지만 밤새 배 위에서 잠을 잘 수 있는 덕분에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밤 배를 더 좋아한다. 물위를 떠 가는지, 하늘을 날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숨가쁘게 달리던 페리와는 다르게 밤 새 유유히 바다를 떠가는 느린 밤 배는 또 그만의 운치가 있었다.


붐비는 1층보다는 누워서 잘 수 있는 2층을 여행객들이 사용한다


 다음날 아침 6시면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하는 배.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잡아 타야 늦지 않게 아루샤에 도착할 수 있다. 아루샤는 탄자니아의 북쪽, 케냐와 인접한 조그만 도시다. 특별히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세렝게티 사파리를 시작하는 베이스 캠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까. 300여개가 넘는 사파리 여행사들로 가득한 그 곳은 세렝게티에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한참을 줄을 서서야 겨우 배에 탈 수 있었다. 벌써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표정에서 피곤함이 먼저 느껴진다. 1층 일반 좌석칸은 원주민들로 이미 발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밤새 있다가는 잠은 커녕 오히려 피로가 더 쌓일것만 같다. 다행히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객실은 2층에 마련된 VIP실이다. 커다란 쇼파와 티비도 있고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매트리스도 이미 넓찍하게 깔려 있었다. 창문이 하나도 열리지 않아 찜통같은게 흠이긴 했지만 하루 방 값을 아끼는 셈 치고 묵어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벌써 1년째 전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는 일본인 커플과, 한국에서 대기업을 다니다가 나와 여행길에 올랐다는 후덕한 인상의 형님, 그리고 우리둘. 우연하게 만난 인연이지만 서로의 여행 이야기, 사는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조금 늦었지만 쇼파 한켠에 자리를 잡고 기우뚱거리는 배의 느린 리듬에 맞추어 잠을 청해본다.



우봉고 버스 터미널은 사람 반 버스 반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이른 아침 잠에서 깼다. 창 밖을 보니 벌써 바다 저 멀리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곳 다르에스살람에서 아루샤까지는 꽤 멀기 때문에 자칫 아침 차를 놓쳤다가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먹고 버스만 타게 될지도 모른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둥 물수건으로 대충 눈가를 훔치고 서둘러 배낭을 챙겨 배에서 내렸다.
 아루샤로 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찾은 우봉고 버스 터미널은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다들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는지 버스를 타는 사람들, 그들을 헤치고 터미널을 나서는 버스, 그들 사이로 음료수며 과자를 팔기위해 손을 번쩍 들고 돌아다니는 상인들까지. 시장인지 터미널인지 모를 그 분주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행여 버스를 놓치기라도 할까, 일행을 잃어버리라도 할까봐 종종걸음으로 어젯밤 빗물이 채 다 마르지 않은 바닥을 요리조리 피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스카니아 버스의 내부, 좁은 내부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에 올랐다. 우리나라 고속버스와 실내가 비슷해 보이지만 의자가 한 줄에 무려 다섯개나 놓여 있어서 엉덩이가 의자 밖으로 자꾸만 삐져나온다. 그나마 나처럼 체격이 작은 사람이면 몰라도 덩치가 산만한 서양 사람들은 가격을 두배 주고서라도 의자 두개를 차지해야 겨우 탈 수 있을것 같아 보인다. 탄자니아 사람들이 흔히 '스카니아'버스라도 부르는게 바로 이 고속 버스다. 고속 버스 말고도 시내버스처럼 생긴 로컬 버스가 있지만 워낙 정류장이 자주 있고 작은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서 가는 탓에, 가격은 싸도 선뜻 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렁크가 닫히고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터미널을 나섰다.

조금씩 변해가는 창 밖의 풍경에 눈길이 먼저 간다


 시내를 조금 달리다보니 어느새 창 밖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벌써 다르에스살람을 빠져 나온걸까. 대도시에는 그다지 취미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탄자니아의 옛 수도에 하루도 머무르지 못하고 스쳐지나간다고 생각하니 왠지모르게 아쉬움이 남는다. 
 길 위에는 어느새 차가 많이 줄었다. 버스는 더욱 속력을 높여 신나게 달린다. 6시간 걸린다고 했으니 대충 점심때 조금 넘어서 도착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오늘의 일정을 짜기 위해 복사해온 론니 플래닛을 꺼냈다. 그런데 첫 표지에 있는 지도를 보니 생각보다 아루샤가 꽤 멀다. 정말 6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걸까 하고 의심도 들었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풍경이 마치 영화처럼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후배녀석은 그새 잠이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심심했는지 계속 불평을 하더니만 자는 얼굴도 왠지 입술이 삐죽 나와 있는것만 같다. 시속 150킬로미터는 족히 넘을듯한 속도로 계속 달리고 또 달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카메라를 꺼내고 나면, 어느새 풍경은 저 멀리 버스뒤로 멀어지고 있다. 도로가 울퉁불퉁해서 그런지 그나마 찍은 사진들은 하나같이 수평이 제멋대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파인애플의 향연


 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파인애플 농장도 보인다. 줄기가 잘려 진열대에 놓아진 열매만 알았지 이렇게 많은 파인애플을, 그것도 땅에 심어진 채로 눈앞에서 마주치니 느낌이 색다르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점점 푸른색에 가까워 지는걸 보며 내가 세렝게티에 정말 가까워지고 있는듯한 생각에 다시 지루함도 있고 이런저런 신나는 상상으로 지루함을 이겨내 본다.

양손을 번쩍 들어 과자바구니를 내 앞으로 내민다

 
 얼마나 달렸을까. 시계를 보니 벌써 버스가 출발한지 여섯시간도 훌쩍 넘었다. 애초부터 그들이 말해주는 시간을 철썩같이 믿은건 아니지만 이제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버스 안에서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멈출 줄 모르고 달리던 버스가 이따금씩 작은 마을에 멈춰 갈때면 어김없이 양손 가득 음료와 과자를 든 어린 청년들이 버스 주위로 몰려들곤 했다. 아직 키가 작아 손이 창가에 닿지도 않는 꼬마들도 까치발을 들어가며 온갖 먹거리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창밖을 보는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조그맣고 딱딱한 의자 때문에 엉덩이는 벌써 물집이 잡힌것 처럼 따갑다. 지갑에서 남은 잔돈을 꺼내 콜라 한 캔과 오렌지맛 크래커를 하나 샀다.

나무에서 방금 따온 신선한 과일을 팔기도 한다


 버스가 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언제 어디서라도 일단 멈추기만 하면 창 밖으로 달려드는 그들. 파는 물건의 종류도 가리지 않고 다양하다. 심지어 바로 앞에 보이는 과일 나무에서 과일을 주워다가 봉지에 담아 팔기도 한다. 사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도 않을 텐데 하루종일 땡볕에서 오매불망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안스러운 마음에 하나쯤 사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화장실 가는것도 여의치 않은 버스안 사정때문에 섣불리 음식을 살 용기가 잘 생기질 않는다. 행여 배탈이라도 났다가는 이도저도 못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마냥 끙끙 앓을 생각을 하니 더욱 그랬다.

점심식사. 숟가락도 씹어 삼킬듯한 나의 표정...


 이번엔 꽤 그럴듯한 휴게소에 버스가 멈췄다. 사람들이 전부다 내리길래 혹시 아루샤에 도착했냐고 물어보니 점심시간이라고 가서 점심을 먹고 오란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지쳐 입맛이 별로 없는듯 해 간단한 패스트 푸드를 하나 사들고 다니 버스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15분이라고는 했지만 언제 출발할 지 모르는 버스를 바라보며 바쁘게 먹는것 보다는 몸은 불편해도 마음 편하게 버스 안에서 먹는걸 택했다. 소스로 범벅이된 점심을 꾸역꾸역 다 비우고 나니 기다렸다는 듯 버스가 또 출발한다.

내려줘...이제 그만


 시계를 보니 벌써 버스를 탄지 10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몇 번이고 물어봐도 기사 양반은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모든건 그때 그때 달라지니 그냥 마음 편하게 앉아 있으란다. 하루종일 흘린 땀으로 벌써 속옷까지 축축하게 젖었고,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할지 모르겠는 엉덩이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물티슈를 하나 꺼내 얼굴을 슥 닦아보니 하얀 물티슈가 아예 검게 변해버린다. 내일 아침 일찍 사파리를 떠나려면 사무실이 문을 닫기전에 가서 예약도 해야하고, 저녁도 먹어야 하고, 방도 잡아야 하는데... 이러다가 사파리를 못하고 아무것도 없는 아루샤에서 하루를 더 보내게 될까봐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흘러가는대로 그냥 즐기면 되는게 여행이지만 자꾸만 짧은 일정을 탓하며 스스로를 다그쳐 본다. 한시간이 더 흐르고, 이제는 아루샤에 못가도 좋으니 그냥 버스에서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예 체념하기로 한다.



도시가 가까워 진 모양이다


 그렇게 한 시간 쯤 더 지나서 드디어 버스를 탄지 12시간 째. 밖에는 갑자기 소나기까지 쏴 하고 내린다. 하루종일 버스 안에서 힘들어했던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걸까. 그래, 차라리 더운것 보다야 비라도 한번 시원하게 맞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또 창밖을 바라보고 앉았다.
 갑자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광고판도 보이기 시작하고, 아까보다 부쩍 차들이 많아진것 같다. 도시에 가까워 진걸까. 이번엔 꼭 아루샤일꺼야, 이번엔 내가 내릴 차례일거야 하고 속으로 외쳐본다. 그리고 마침내. 버스를 탄지 열 두시간 삼십분만에 먼 여정을 마치고 아루샤에 발을 내 딛을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제일먼저 뭐라도 좀 먹고 싶었다. 그토록 바라던 사파리 못해도 좋으니 일단 뭐라도 좀 먹고 싶은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벌떼처럼 호객꾼들이 몰려든다. 한참을 도망다니다가 결국 인상이 좋아보이는 아저씨를 택했다. 운 좋게도 친절한 분을 만나서 사파리 예약도, 숙소도 한번에 다 해결할 수 있었다.



배부르게 먹어 더욱 행복했던 아루샤에서의 첫 식사


 휴. 한숨을 길게 내쉬어 본다. 모든걸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짐을 풀러 놓는데 서로 한마디도 말이 없다. 밤새 배를 타고 다르에스살람까지, 또 오자마자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아루샤까지. 아무것도 본것도, 한것도 없이 그저 앉아있기만 했던 하루지만 그 어떤 날보다 더 피곤한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샤워가 제일 하고 싶었다던 후배녀석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러가며 뜨거운 물로 까만 얼굴을 씻어냈고, 이어서 나도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방도 싼 가격에 구했겠다, 사파리도 내일 떠나겠다, 오늘은 서로에게 주는 선물인 셈 치고 저녁좀 배불리 먹어보자며 밖에 나왔다. 이미 늦은시간이라 위험하기도 하고 문을 연 식당도 안보이길래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로컬 식당에 들어가 치킨이며 감자칩이며 한가득 시켜서 먹고 또 먹었다. 별것 없는 탄두리 치킨이지만 어찌나 맛있던지 배가 너무 불러서 더이상 못먹을때까지 마음놓고 여유로운 만찬을 즐겼다.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 너무 힘들었지만 내일이면 드디어 세렝게티로 떠난다. 그토록 꿈꿔왔던, 내가 아프리카를 찾은 단 하나의 이유, 세렝게티. 사진 몇장 보고, 글 몇개 읽은게 내가 아는 전부지만 그래서 더욱 설레이고 또 기대가 되는가보다. 아침 일찍부터 바로 베이스캠프로 차를 타고 출발해야 하기에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한다. 잠깐만 누워있어도 허리가 아플정도로 물컹한 스펀지 침대지만 눕자마자 불 끄는것도 잊고 둘다 그렇게 잠이 들어 버렸다. 덜컹거리는 버스가 아니라 편안한 침대에 누웠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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